난민촌 아이들의 소망은 '한 줌만 더'

중동 평화활동 중인 박노해 시인 박노해l승인2008.01.2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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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도 따뜻한 새해 맞을까요

중동에서 평화활동 중인 박노해 시인이 최근 분쟁이 최고조에 달하는 레바논에서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박 시인이 활동 중인 ‘나눔문화’(www.nanum.com) 회원들의 정성으로 만든 ‘자이투나 나눔문화학교’를 현지에서 지켜보고 있는 박시인은 “새 정권을 맞아 우려와 기대가 뒤섞여 어수선한 한국의 현실도 힘들지만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 중동에서는 하루하루 폭격소리 속에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며 “잠시 바삐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함께 평화의 마음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편집자

저는 지금 ‘레바논의 거대한 감옥’인 ‘아인 알 할웨’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있습니다.

새해 첫 새벽, 난민촌에서는 거대한 폭음이 진동했습니다. 잠자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유리 창문이 깨지고 우리는 공포에 떨며 한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비닐봉지 날리는 질척한 골목길마다 아침 햇살은 눈이 시리도록 맑은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떨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기대할 것 없는 새해를 맞아 그래도 식은 빵에 샤이를 차려놓고

새해 아침 기도를 드립니다. 잠들지 못해 눈이 빨개진 아이들의 기도 소리가 들려옵니다.

“새해에는 한 명만 덜 죽게 해 주세요. 한 집만 덜 폭격에 맞게 해 주세요. 한 줌만 피를 덜 흘리게 해 주시고 한 줌만 더 공포에 떨지 않게 해 주세요.”

난민촌 아이들의 새해 소망은 ‘한 줌만 더’일 뿐입니다. 한 줌의 새해. 한 줌의 기도.

<사진제공=나눔문화>
최창모 교수(건국대 히브리중동학과)와 함께 중동의 레바논에서 평화활동을 벌이는 박노해 시인의 모습

새해 처음부터 마음 아픈 소식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난민촌의 ‘한 줌의 희망’이던 ‘자이투나 나눔문화학교’가 학교부지와 건물을 비워줘야 하는 우울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학교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얇은 옷을 입고 떨면서 어린양들처럼 우르르 우르르 따라다니며 제 볼에 입을 맞추고 목에 매달리는 아이들 속에서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레바논 북부의 다른 난민촌이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 갈 곳 없는 난민들이 '아인 알 할웨'로 몰려들어 땅값과 집값이 폭등하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가 무상으로 빌려 쓰던 학교부지와 교실을 내 줄 수밖에 없어 아이들과 자이납은 하루아침에 갈 곳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제(14일)는 제 51회 생일이었던가 봅니다. 오늘은 자이납(교장, 나눔문화 현지 연구원)의 25살 생일날입니다. 전깃불도 나가버린 난민촌의 춥고 어두운 방안에서 낮은 생일 축하 노랫소리에 촛불이 흔들립니다. 제 마음도 촛불처럼 어둠 속에 흔들립니다.

자이납은 어떻게든 학교를 살려 보겠다고 온 난민촌을 누비며 학교로 쓸 만한 건물을 알아보고, 그곳으로 저를 이끌고 다닙니다. 어두운 난민촌 골목길에서 자이납은 애써 웃으며
젖은 음성으로 묻습니다.

“샤이르 박, 이제 학교는 사라지는 건가요. 아이들의 가난한 꿈도 한 줌의 희망도 사라지고 마는 건가요.”

저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자이납의 얼굴을 바라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통역을 하던 최창모 교수님과 등을 돌려 난민촌을 빠져나오는데, 소리 없는 눈물이 강물입니다.

잠시 후, 우리는 이라크 국경지대 알까미슬리로 떠나 세계에서 버려진 쿠르드 아이들을 만나고 다시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들어갑니다. 이곳 모두 상황이 갈수록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과 우리 하는 일은 하늘의 뜻임을 믿을 뿐입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한 번 더 웃으시고 좋은 일들이 광야의 꽃처럼 피어나시기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8년 1월 15일
레바논에서 알까미슬리 가는 길에

박노해 시인

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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