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의 금도, 겨레 다시 하나로 인류 보듬다

강상헌의 한자, 인간의 맛/성자 김수환의 ‘그릇’ 강상헌 논설위원/우리글진흥원장l승인2019.03.0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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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성자 김수환 추기경 가신 지 10년. 그 바보, 아직 늘 그립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종교 박해의 고난 속에서 구웠던 독그릇 옹기(甕器), 그 이름과 고운 뜻을 이 성자는 당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신(神)들의 나라’ 인도에 그릇 주제의 이런 얘기 있다더라. 어떤 항아리든, 깊은 바다 속에서도, 제 크기만큼 밖에는 물을 못 담는다는 줄거리다. 당연하지만, 뭔가 다른 뜻으로 생각을 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릇의 크기라니.

▲ 고 김수환 추기경 (다큐멘터리 영화 ‘바보야’의 한 장면)

세상 건너는 데 기술이 필요할까? 고전의 얄팍한 인용에서부터 그릇의 이미지는 사람의 품성을 평가하는 데 늘 활용된다. ‘그릇이 커야….’하는 말들, 소위 처세술의 큰 항목이란다. 정작 그릇은 아무 생각도 없을 터. 세상은 기술 말고, 사랑으로 건너는 것 아닌가.

옹기와 달리 인간의 그릇은 죽을 때까지, 어떤 경우에는 죽고 나서도 변한다. 어렵다고들 하는 동양고전 주역(周易)의 ‘역’의 뜻 중 한 갈래다. ‘변한다(易)는 사실 말고는 다 변한다’고 하니 도리(道理)를 푸는 방법의 표현은 오묘하다.

인간을 비유하는 ‘큰 그릇’을 도량(度量)이라고 한다. 더 고급 언어는 금도(襟度)다. 가난한 이들을 보듬어 세상을 품은 바보 김수환 성자의 마음, 금도나 도량의 크기와 아름다움을 선종(善終) 10주기에 명상하는 것이니 마음 가난한 이웃들 함께 기뻐하자고 삼가 청한다.

큰 그릇 곧 대기(大器)는 노자(老子) 도덕경에서 비롯한다. ‘큰 네모는 귀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더디 이루어지며, 큰 소리는 희미하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고 했다.

마음 내려놓으면 차츰 드러나 보이는, 시(詩)를 위한 이미지나 참선의 화두(話頭)같은 뜻이다. 大器는 대방(大方) 대음(大音) 대상(大象)과 함께 노자가 도(道)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였다. 모서리(隅) 없는 네모(方), 소리 작은(希聲) 큰 소리, 모양 없는 큰 형상(大象)이라니.

이런 비유의 방정식으로 대기를 해석하는 것이다. 晩成은 ‘오래 걸린다’보다는 난성(難成) 즉 ‘이루기 어렵다’로 읽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도(道) 이루기가 어찌 쉬울까? 晩자의 뜻 또한 ‘해 저물다, 늦다’라는 부정적인 뜻임을 아울러 떠올려본다.

큰 그릇인양 저마다 착각하는 설익은 인간들의 허실(虛實)을 이미 노자는 본 것이리니. 다만 웃어주어야 할지.

후한의 학자 왕충(王充 27∼104년)이 ‘논형’(論衡)에서 대기난성(大器難成)이라는 말을 쓴다. ‘노자읽기’의 기준을 세운 셈이다. 오래 갈고 닦아서 인간이 큰 그릇이 된다는 (희망적인)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나 사람들은 대기만성을 제 멋에 겨워 여러 뜻으로 읽고, 활용해 왔다.

위나라의 최림(?∼240년)은 못생겨서 출세가 늦은 까닭에 처음엔 멸시를 당했다. 사촌 형인 장수 최염이 일찍이 그의 재능을 파악하고 ‘대기만성이니 좌절 말고 노력하라’고 격려해 후에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기만성이 ‘오래 걸린다’의 뜻으로 쓰인 고사다.

그릇이 인간의 크기라는 비유, 역사가 빚은 이 고사성어의 원래 뜻이 우리 알던 뜻과 꽤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분도 있겠다. 혹 시험에라도 이 말의 뜻 묻는 문제가 출제된다면 혼란 또는 논쟁을 부를 소지도 있다. 관계자들은 주의할 것.

말과 글의 전주(轉注)는 역사와 함께 살아 이렇게 숱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든다. ‘전주’는 (언어가) 구르고[轉] 흘러[注] 만들어진 것이라는 한자관련 언어학 즉 문자학의 개념이다. 만성(晩成)이든 난성(難成)이든, 이 큰 그릇 대기(大器)는 본디 도량(度量)이나 금도(襟度)를 이르는 착한 마음의 자리일 터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이 요지경 속 한국(서울) 교육을 그려 관심을 모았다더라. ‘마음자리’또는 덕(德)과 인(仁)의 뜻을 우리의 언어에서 깡그리 삭제해버린 것 같은 대한민국의 황무지에서 사랑의 교육이 자라기를 바랄 수 있을까?

어떤 농부의 뜻이라는, 책 제목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말을 생각한다. 혁명의 개벽(開闢)을 공상하는 젊은 밤, 옹기바보 우리 추기경님 지금 잘 주무실까?

▲ 국립나주박물관의 옹관.

토막새김

“줏대 되세울 웅혼한 춤사위 다시 마련하라”

옹관묘(甕棺墓)는 농사와 수산(水産)으로 풍요롭던 서남해안에서 고대 마한 때 생겨났던 특별한 장묘다. 서라벌(경주) 개경(개성) 한양(서울)에서 보면 한반도 끄트머리지만, 실은 당시 번영했던 태평양 동아시아지중해의 핵심 지역이다.

금성(錦城)이었던 나주 일대의 과거 영화(榮華)이고 긴 역사의 뒷배겠다. 영험함으로 계룡산 마니산과 맞장 뜬다는 나주의 진산(鎭山) 금성산에 오르면 가슴이 먼저 안다. 어찌 괜히 이 바다가 장보고와 이순신, 국제적으로 걸출한 두 군신(軍神)의 본거지가 되었으랴!

국립나주박물관의 옹관은 역사의 미진한 설명을 황홀한 상상으로 덮어준다. 장엄한 일대의 고분(古墳)들 또한 그 옹관을 닮았다. 옹관은 길고 큰 옹기다. 사람이 놓였다. 무서운, 힘센, 부유한, 그리운, 사랑하는, 아끼는, 미운, 악독한 이의 주검을 담은 그릇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영원을 얻은 듯, 첨단 미학마저 느껴지는 곡선의 절묘함도 살피자.

눈을 감으라. 거기 앉으면 고고학 같은 (서양)학문과 우리 뼛속 기운 사이의 위화감 또는 괴리(乖離)를 절감한다. 아직 우리 역사(교과서)는 잘 모르는, 겨레의 삶이다.

도량이나 금도도 너끈히 담아내는 옹기, 바보 성자를 닮은 그 아름다운 마음자리는 예로부터 이렇게 우리의 풍류(風流)였다.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弘益)의 시발점이다. 하늘을 하늘이게 하는 간절한 기원 담은 무천(舞天) 춤으로 문명의 새벽에 우리는 한겨레 됐다.

반만년 속 수십 년, 잠시 잊었더라. 다시 겨레 하나 된다. 줏대 되세울 웅혼한 춤사위 다시 마련하라. 당신이, 우리가 큰 그릇 김수환이다.

강상헌 논설위원/우리글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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