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주의 개혁을 고민하자

특별기고_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조희연l승인2008.04.2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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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실정 반사이익 넘어 대안 축적
정당정치질서 업그레이드·운동정치 실천


지난 9일 치러진 총선결과를 보면서 나는 “어느 정치집단도 다 자기 방식대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선거” 결과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수당이 된 한나라당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조경태, 최철국 후보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호남 이외의 전국 전 지역에서 당선가능성을 확인한 통합민주당, 공천탈락자들을 가지고 박근혜의 이미지에 기대어 선전한 친박연대, 여당실세를 꺾고 당선되고 비례대표 의석까지 획득한 창조한국당, 권영길, 강기갑 후보가 지역에서 당선되고 5.8%의 정당지지를 획득한 민주노동당, 비록 3%진입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조봉암 이후 50년만에 수도권에서 노회찬, 심상정 의원의 당선가능성을 확인한 진보신당, 심지어 아무 배경 없이 돈만 내고도 비례대표에 당선될 수 있는 ‘돈만 가진 비례대표 후보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선거였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부터 꺼내는 것은 지난해 12월 대선의 참담한 결과를 뒤로 하고 5개월이 지난 지금, 훨씬 넓은 스펙트럼의 변화가능성을 갖는 상태로 진입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대선 이후의 ‘절망’적 분위기에 비하면 많이 반전되었으나, 다른 한편에서 시민사회운동이 어떤 응전을 하느냐에 따라 너무도 다양한 경로를 밟을 수 있다고 보여진다.

정당정치 질서과 관련하여 이런 다양한 가능성은 아래와 같은 몇가지 경로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즉 ①보수(우파)정당이 패권적 지위를 갖는 일본형 정당정치 경로 ②진보정당이 착근하지 못하고 보수(우파)정당과 중도자유주의정당이 경쟁하고, 그들 간의 주기적인 정권교대가 이루어지는 미국형 정당정치 경로 ③보수(우파)정당과 진보정당이 기본축으로 경쟁하고 거기에 다양한 군소정당들이 경쟁하는 유럽형 정당정치 경로이다. 물론 여기에 더욱 ‘우파적인’ 구도도 가능하고 더욱 ‘좌파적인’ 경로도 가능할 것이며, 각 유형의 혼합적 상태도 가능할 것이다.

사회(적)민주주의 단계로의 병목

생각해보면 한국사회는 지난 20년 동안 자유민주주의적 개혁단계를 성공적으로 거치면서 이제 사회(적)민주주의개혁단계로 가는 병목지점에 직면했는데, 그 병목지점을 돌파하지 못하고-‘신진보정권’이 아니라-조야한 ‘신보수정권의 출현’이라고 하는 우회로로 들어선 것 같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 이후 한국사회가 민주화 이행의 경로로 가지 못하고 신군부정권이라고 하는 우회로로 들어섰듯이 말이다. 이러한 우회로에서 시민사회운동이 어떻게 응전하느냐에 따라 한국사회는 다양한 경로로 진입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명박 정부라고 하는 조야한 한국형 신보수정권과 대결하면서 사회(적)민주주의적 개혁단계로 한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가야 한다. 최소한 ①의 가능성을 극복해내면서 ②의 단계를 넘어 ②와 ③의 중간형태 나아가 ③의 상태까지도 현실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즉 의회의 보수독점을 깨뜨리고 더욱 다원적인 의회질서를 만들어야 하며 중도자유주의정당의 사회적 성격이 보다 강화되고 진보정당이 더 큰 몫을 하는 의회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사회(적)민주주의라고 쓰는 것은 20세기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라는 의미도 있지만 90년대 이후 시민사회운동이 추구해온 ‘민주주의의 사회적 확장’이라고 하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물론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이나 복지사회 실현은 서구의 그것과 달라야 하며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내 식으로 이야기하면 ‘생태평화·사회(적)민주주의’ 단계일 수 있고 혹은 홍성태 상지대 교수가 이야기하는 대로 ’생태복지사회‘일수도 있다.

확장된 제도정치·운동정치 협력모델

그러한 한단계 높은 한국사회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것을 담지하는 보다 전향적인 의회질서 혹은 정당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제도정당은 주어진 ‘사회적·계급적 지형’ 내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기 위해서 경쟁하는 집단이며, 시민사회운동(혹은 운동정치)은 바로 그 지형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최장집 교수와 내가 이른바 ‘진보논쟁’이라는 것을 했을 때 최 교수의 핵심논지는 분단의 왜곡(정당의 사회적 기반의 왜곡)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의 전락)의 제약을 극복하고 ‘정당정치의 확장과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시민사회신문 DB
신자유주의 개방화 시대, 새로운 빈곤과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현실에서 90년대식 ‘개혁 대 반개혁’ 프레임을 뛰어넘는 화두로 한국적 사회민주주의가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대선시민연대의 ‘7대 삶의 질 향상 과제’ 선포 장면.

사실 한국사회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 시대에 이르는 선진국 문턱에 있는 사회이고 남미에 비교한다면 선거민주주의 20년을 경과하면서 그 틀이 상당히 정착되어 있는 사회이다. 한국사회는 불가피하게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이해를 반영하고 해결하는데 있어 정당정치가 더 많은 역할을 하는 상태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과 같은 사회경제적 진보정치세력이 진입해야 한다. 통합민주당 같은 중도자유주의정당은 과거의 ‘정치적 개혁주의’에서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로 전환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정당정치의 정상화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계급적 지형-그것을 구성하는 대중들의 의식을 포함하여-을 형성하기 위해 시민사회운동이 해야 할 몫은 더 크게 남아 있고, ‘확장된 제도정치’와 사회운동(운동정치)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시민사회운동의 주체적 역할의 몫은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운동이 강력한 이니셔티브를 갖는 ‘(확장된)제도정치-운동정치의 협력모델’을 꿈꾸고 있다. 이처럼 제도정치를 확장·정상화하고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더 큰 협력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도 시민사회운동은 그러한 상태가 가능한 사회적·계급적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를 ‘사회의 급진화’ 혹은 ‘대중의 급진화’라고 표현한다. 또는 은유적으로 ‘강남 사람은 계급의식이 투철한데 강북사람이 계급의식이 없다’라고 표현한다. 시민사회운동이 5년 동안의 이명박 정부 하에서 한단계 전진을 위한 사회적·계급적 지형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영국의 전철(80년 대처정권이 성립하고 17년 후에 노동당 정부가 들어섰는데 그 노동당은 ‘좌파경력을 가진 보수당’으로 이미 변신해 있었다)을 밟을 수도 있다.

운동의 메시지 변화시켜야

물론 영국의 신보수정권이 ‘복지국가의 전제 위에서 성립한 신보수정권’이고 한국의 신보수정권은 ‘전(前)복지국가적 신보수정권’이기 때문에 새로운 개발드라이브는 많은 균열을 동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명박 정부가 과거 박정희 정권의 ‘위기요인’들을 성찰하면서 박정희가 성장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도외시했던 것들을 자신의 정책 속에서 보완적으로 융해해내지 않는다면 ‘정치적 위기는 시간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단지 시민사회운동이 고민해야 할 지점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기인하는 반사이익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한국정치와 한국사회의 한단계 높은 사회(적)민주주의적 상태로의 업그레이드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계급적 지형의 형성, 그 일부로서의 대중의식의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에 대한 시민사회운동의 메시지도 변화시켜야 한다. 예컨대 이른바 조중동은 이제 더 이상 ‘반개혁지’가 아니라 ‘우파 계급지’로 규정되어야 한다. 동아일보와 같이 전면적으로 ‘친 한나라당지’를 표방하는 신문의 정치적 성격도 분명한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 우파 계급지는 개발독재를 통해서 성장한 대자본과 시장의 계급적 이해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러한 이해에 복무하는 정책과 정당에 대해서 지원하고 동맹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시민사회의 요구와 이해가 공론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정당과 언론이다. 이 두가지 매개적 기구들이 왜곡되어 있고, 그 왜곡된 매개역할이 한국사회의 한단계 높은 진보화를 제약하고 있다.

또한 참여정부 하에서 시민사회운동이 돌파해내지 못한 병목지점들을 정책적으로 분명히 하고 대중에게 정면으로 설득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컨대 ‘감세 내 증세’내의 논쟁에서 시민단체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 ‘비겁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보수언론은 ‘세금폭탄’이라는 담론으로 대중의 의식에 ‘융단폭격’을 가했고 이것은 이명박 정부가 성립할 수 있는 사회심리적 기반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복지사회는 불가피하게 가진 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매기는 방식으로 성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 또한 이명박 정부의 각종 규제 완화가 사실은 ‘대기업과 가진자들에 대한 지원정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경실련이 적절히 정의했듯이 경부운하는-환경적 관점에서도 문제이지만- ‘토건재벌에 대한 특혜지원정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과거 개발독재와 달리 중소기업, 자영업,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노동자, 여성노동자, 도시빈민은 신자유주의 개방화 시대의 새로운 빈곤화와 배제화의 메커니즘에 의해 고통받게 되고, 이는 새로운 저항적 주체성을 표출시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저항성에-90년대 ‘개혁 대 반개혁’이라는 프레임을 뛰어넘는-보다 급진화된 정의와 해석을 대중에게 제시해야 한다.

앞으로를 전망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박정희 시대 1차 개발드라이브가 위기에 처하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점차 대중화해가는 과정을 현재의 상황과 비교해보게 된다. 60년대와 70년대 초를 통틀어 박정희 정권은 개발(혹은 근대화와 산업화)이라고 하는 거대한 국민적 프로젝트를 통하여 대중들을 위로부터 동원하고 자발적으로 이 대열에 합류하도록 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70년대를 거치면서 위기에 처하고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위기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1차 개발의 ‘성공적 추진’이 동반하는 새로운 모순들, 이에 대항하는-새로운 비전과 대안프로젝트를 갖는-리더십의 출현, 그것을 수용하고 지지하는 ‘변화된 대중’ 등이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의 2차 개발드라이브의 향후 경로를 이에 비교해볼 수 있다. 2차 개발드라이브의 모순과 그것이 가져오는 대중들 수준에서의 긴장은 이미 출현하고 있고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를 이끌 새로운 리더십과 대안프로젝트가 불분명하다. 또한 ‘강남 사람은 계급의식이 있는데 강북사람이 계급의식이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대중들의 의식상태가 존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뉴타운 개발’ 등으로 상징되는 대중들의 새로운 물질적인 ‘욕망’은, 사실 민주화과정에서 억압된 소외된 정서가 표현된 것이다. 자신들을 소외시켰던 개발독재 시대의 수혜자들과 가진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기보다 ‘모방적 욕망’을 가지고, 신보수정권에 지지를 보내고, 신개발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공적·사회적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개발프레임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총선에서 표현된 뉴타운 선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긴 호흡으로 이를 뛰어넘는 실천을 축적한다면 이제 신보수정권을 뛰어넘어 한단계 높은 사회(적)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중요한 고민의 하나가 여기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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