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자(虎列剌)’의 비밀

한국어 쓰는 사람 바보 만드는 음역(音譯)이라는 허방 강상헌 논설주간/한국어문연구원장l승인2020.02.2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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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같이 ‘말’을 설명한 사전(辭典)이나 백과사전처럼 ‘사물’을 설명한 사전(事典)의 풀이에는 음역(音譯)이라는 말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음을 빌린다’는 음차(音借)라는 말이 이 음역과 관련해 등장하기도 한다.

▲ 해방 후 귀환 백성들 머리와 옷 속에 DDT를 뿌려 방역을 했다더라... KBS가 그 장면들을 소개했다. (방송 갈무리)

사전은 ‘음역’을 ‘한자음으로 외국어의 음을 나타내는 일. Asia를 亞細亞(아세아), club을 俱樂部(구락부)로 표기하는 것 따위’라고 푼다. 한자의 소리(발음)을 빌려 외국어, 구체적으로는 Asia나 club과 같은 서양문물의 이름을 우리말글로 표기하고 읽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전은 음역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말의) 음역어를 보면, 본래 소리에 가까운 글씨를 찾느라 애쓴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대통령 관저 백악관(白堊館)이 있는 미국 도시 Whashington의 음역어는 화성돈(華盛頓)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뭐라고? Whashington의 음역어는 당연히 ‘워싱턴’ 아닌가? 난센스 퀴즈나 블랙코미디의 장면 같은 이런 말들은 한국어의 기능과 품격을 크게 떨어뜨린다. 말과 글, 간결하고 명확하지 않으면 그 사용자들의 생각 또한 흐릿해질 터다. 학문도, 정치도 다 그러하리라.

KBS의 한 프로그램이 1945년 일본 패망(敗亡) 이후 고국으로 귀환하는 우리 백성들의 머리와 몸에 마구 DDT를 뿌려 방역(防疫)하는 미군들의 얘기를 소개했다. 중국 우한에서 비롯한 코로나바이러스의 상황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한 출연자가 ‘그때는 콜레라를 호열자라고 불렀다’고 나섰다. 콜레라를 일본어로 음차한 게 ‘코레라’인데, 호랑이가 긁어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위험한 병명이어서 (호열자가) 콜레라를 표현하는 이름이 됐다고 소개했다.

그 발언의 취지는 그럴싸하다. 아차, 그렇다면 콜레라가 호열자가 된 내역은 소리를 빌린 음차 또는 음역이 아니었네, 뜻을 빌린 것 아닌가. 뭔가 이상하다. ‘콜레라의 음역’이라는 국어사전의 풀이는 또 뭐지?

‘화성돈’의 경우는 최소한 ‘소리를 빌렸다’는 짐작은 가능하지 않은가. 음역 또는 음차의 뜻에 혹시 ‘알면 다치는’ 심각한 비밀이라도 숨어있나? 문화의 교류는 시대 간, 지역 간의 정보의 나눔이다. 그 바탕에는 말과 글의 옮김 즉 번역이 있다.

호열자의 경우로 말글과 문물 교류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다. 서양문물 도입 당시 중국과 일본의 (학문 등의 용어) 번역 또는 새 개념에 대한 작명의 과정이 설명됐어야 음역이라는 말이 제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짜고짜 ‘호열자는 콜레라의 음역’이라는 사전과 역사교과서 설명은 거의 망발이다. 중국과 일본의 사전에 나올 말을 우리 사전에 그대로 (베껴) 쓴 꼴이다.

우리가 일본에서 서양문물을 전해받기 훨씬 전에 콜레라는 虎列剌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우리의 역사에 등장한다. 중국이 콜레라(cholera)의 이름을 그렇게 쓰기 시작했고 우리도 그들을 따랐던 것이다.

虎列剌의 중국어 발음은 대략 [훌리에라]다. 발음이 같은 拉을 써서 虎列拉이라고도 한다. 虎列剌의 (우리말) 한자어 발음은 ‘호열랄’, 虎列拉은 ‘호열랍’이다.

범 호(虎)자로 무서운 돌림병이라는 의미도 섞어 만든 이 말은 [콜레라]의 발음도 능히 연상하게 한다. 코카콜라를, ‘입맛에 맞아 즐길 만하다’는 뜻도 비슷한 소리 담은 가구가락(可口可樂 커코우컬르)으로 옮긴 중국식 작명(作名)처럼 고개 끄덕이게 된다.

언젠가, 누군가, 랄(剌)자를 자(刺)자로 잘못 쓴 것이 ‘호열자’의 출발점이었던 듯. ‘발랄(潑剌)하다’는 말의 어지러질 剌자는 ‘자극(刺戟)’의 찌를 刺자와 많이 닮아 잘못 쓰기 쉽다.

허나 현재 언중(言衆)이 모두 그리 쓴다하니 꼭 ‘호열랄’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다. 결국 호열자(虎列剌)는 중국어의 음역 또는 음차였던 것이다. ‘우리 국어’의 무책임함을 지켜본다.

중국 일본이 번역한 말들을 우리 (한자어) 발음으로 읽으라 하고서는 ‘음역’이란 말 간판 삼아 수수방관(袖手傍觀)하는 모양새이니 우리말글 더 흐리멍덩해지겠다. ‘한자를 매개로 한 2중 음역’이라는 뜻의 설명을 얼른 도입해야 할 터, 뜻이 통해야 말이다. 말 아닌 말은 버리라.

▲ 책(1902년) 제목은 虎列剌(호열랄)인데, 네이버 사전의 해설은 虎列刺(호열자)로, 한글 ‘호열자병예방주의서’라고 적힌 자료의 표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토/막/새/김

질병 이름에도 정명(正名)이 있다

사스나 메르스, 우한 사태의 바이러스인 코로나바이러스는 그 모양이 태양의 코로나를 닮아 붙은 이름이다. 코로나는 태양의 바깥쪽 대기(大氣)를 말하는 것으로, 원래 뜻은 ‘왕관’이다.

흑사병(黑死病)은 죽어 사체가 검게 변한다고 하여 페스트에 붙은 다른 이름이다. 천연두에 붙은 ‘마마’라는 별명은 그 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를 느끼게 한다. 마마는 임금과 그 가족에게 붙는 존칭이었다. 지랄은 간질(癎疾)의 다른 이름이다. 염병(染病)은 전염병이나 장티프스를 부르는 이름인데 흔해지자 천시하는 언어라고 쓰지 말자고도 한다.

질병의 이름에는, 별명에도, 이렇게 뜻이 있다. 모든 사물의 이름에 합당한 이름 정명(正名)이 있는 것과 같다.

강상헌 논설주간/한국어문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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