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행위를 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철학여행까페[52]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11.0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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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 논쟁의 와중에 피히테는 1799년 7월 1일에 별안간 예나를 떠나 베를린으로 갔다. 피히테가 도착하자 프러시아 정부 최고 내각인 추밀원은 왕이 돌아 올 때까지 그를 감시했다.

프러시아 왕은 작센의 영주 보다 피히테를 관대하게 대했다. 왕은 신하들에게 “자비로운 하나님이 그와 대화할 수 있도록” 하자면서 피히테에게 “성직자들의 파문과 신자들의 돌팔매질에서 몇 년 동안 보호되어 조용하게, 대중의 소란과 그 대중에 대한 그의 구역질이 다 지나갈 때 까지 지낼 수 있는 조용한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다.

이동희
강의하는 피히테.
무신론 논쟁 속의 피히테


피히테는 특유의 열정과 출중한 웅변실력으로 베를린에서 강의를 했다. 사람들은 그의 열정적이고도 확고한 철학 강의에 매료되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지도적인 정치인과 지식인도 그의 강의를 들으러 왔다.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 중에는 오스트리아 특명 전권대사 메테르히니도 있었다. 피히테를 따르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그들 중에는 독일 낭만주의의 중심인물인 슐레겔 형제와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시인 티이크 등도 있었다.

베를린에서 머무는 동안 피히테는 자신의 철학을 종합한 몇 권의 책을 썼다. 그는 우선 일반독자들을 상대로 짧고 명료하게 자신의 철학을 알리는 책인 <인간의 사명 Die Bestimmung des Menschen〉(1800)을 저술했다. 이 책은 예나에서 그가 행했던 철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철학이 무신론 논쟁에 부당하게 취급당한 것을 변론했다.

그가 이 해에 쓴〈폐쇄적 상업국가 Der geschlossene Handelsstaat〉(1800)도 초기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글로서 보호관세 무역제도를 찬성하는 글이다. 이 밖에도 그는〈지식학 Wissenschaftslehre〉에 관한 글을 새롭게 썼다.

1805년에 그는 프러시아에 속한 에어랑겐 대학의 철학교수로 부름을 받는다. 1806년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꺾고 승리하자 피히테는 국왕을 따라 베를린에서 쾨니히스베르크로 갔다.

그러나 피히테는 코펜하겐을 거쳐 다시 1807년 8월에 프랑스 군에 점령당한 베를린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그해 12월부터 그 유명한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다음해 까지 베를린에서 계속 행하였다. 그는 프랑스 정보원이 감시하는 가운데서도 나폴레옹을 비판했다. 사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고 환호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스스로 왕관을 쓰고 유럽 정복을 꾀하는 나폴레옹에 의해 완전히 변질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정신에 도덕적 의무감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인류의 구원자며 해방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신의 손에 쥐어진 채찍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신 앞의 제단인 양 우리의 벌거벗은 등을 채찍 앞에 내놓고 핏자국이 맺혀서 ‘주여! 주여!’ 하며 구원을 청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채찍을 꺾어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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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의 집

그는 이 연설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비판 말고도 독일 국민 전체가 하나 되어 도덕적 부흥을 이룩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1809년에 그는 새롭게 설립된 베를린대학교 철학과의 학장이 되었고, 1810년에는 초대 총장에 선출되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학생들에게 전쟁에 나가도록 종용하였다. 그 자신도 정훈장교로서 종군하려했으나 왕은 ‘피히테의 웅변술이 승리를 위해 더 필요하다며’ 그의 청원을 거절했다. 피히테는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고, 평화 조약 체결도 보지 못했다. 간호원인 아내가 야전병원에서 얻은 장질부사에 전염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는 회복되었지만 그는 1814년에 52세의 나이로 죽었다.

피히테는 스스로를 진리의 사제로 자처했다. 철학은 ‘진리’를 설파하는 학문이다. 피히테가 주장하듯 철학에 종사하는 철학자는 ‘진리의 사제’여야 한다.

“나는 진리의 사제다. 나는 진리에 고용 당했다. 나는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고, 과감히 시도하고, 견뎌내야 할 의무가 있다.” (‘학자의 사명에 관하여’)

이동희
말년의 모습
학자의 사명에 관하여


피히테는 철학을 지식학(Wissenschaftslehre)으로 규정한다. 철학은 다른 학문처럼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식 자체를 다루는 학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히테는 ‘지식론’ 을 통해 한 가지 원리로부터 수미일관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지식을 도출하고자 했다.

그는 칸트철학은 이러한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본다. 칸트는 인식의 능동성과 자발성을 분명하게 주장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인식은 외부의 대상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인식의 한계를 분명하게 했다.

그에 따르면, 인식은 현상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칸트는 현상들의 배후에는 우리에게 작용을 가해 오는 ‘물 자체’의 세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만약 이성이 ‘물 자체’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성은 자기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세계를 알려고 하는 모순, 즉 이율배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 자체’의 세계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 수 없는 ‘물 자체’에 우리의 인식이 의존한다면, 우리의 인식의 능동성과 자발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또한 ‘물 자체’의 세계를 우리의 인식이 알 수 없다면 우리의 인식이 ‘물 자체’ 에 의존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기서 피히테는 철학이란 독단론과 관념론 두 가지 밖에 없다고 말을 한다. 독단론은 초월적인 물 자체를 인정하고, 그 물 자체로부터 우리의 표상을 도출한다. 이러한 입장은 경험론이나 유물론과 같은 독단론이다. 피히테는 이러한 입장을 용납할 수 없다. 그가 볼 때 ‘나’는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아 표상을 하는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나’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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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와 부인의 묘지.
피히테는 ‘현상계’와 ‘물 자체’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인식 주체인 자아의 능동성을 주장한다. 그는 이점에서 독특한 개념인사행(Tathandlung)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행이라는 개념은 결과로서의 사실 뿐만 아니라 과정의 행위까지도 나타내는 용어이다.

피히테는 지식학을 통해 ‘자아’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우리는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피히테는 자아는 ‘인식적 존재’가 아니라 ‘인식의 행위자’ 라고 본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서 그 자신의 자아를 경험한다. 우리가 마주 대하는 세계는 결코 우리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그것은 자아의 행위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피히테가 강조하는 주체인 자아는 인식하는 자아일 뿐만 아니라 행위 하는 자아이다. 그에 따르면, 인식 대상이 되는 객관적 세계란 것은 이 자아가 창조한 세계이다. 그것은 자아가 자체 내에서 산출한 ‘비아’인 것이다.

피히테는 자아가 비아를 산출하고, 또한 자아와 비아가 서로 영향을 받으며 규정하는 것을 변증법적 원리인 정반합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자아는 근원적이며 직접적으로 그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자아에는 바로 비아(非我)가 대립한다.”

“자아와 비아는 전체적 자아 안에서 상호적으로 서로를 한정하고 규정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금을 인식할 때 우선 그것을 금이라고 정립하고 그 다음에 금 아닌 것 즉 동이나 은 등과 구별을 하며 인식한다. 그 다음에 이 모든 것들을 금속이라고 하는 더 높은 종합 속에서 보면 금과 동 그리고 은은 금속에 속해 있지만 서로 한정하고 규정하면서 서로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

피히테는 이런 지식학을 바탕으로 도덕이론을 전개했다. 그에게 지식학은 애당초부터 ‘행위’와 연관되어 있기에 도덕학으로 전개된다.

“우리들은 인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

그는 <윤리이론의 체계>에서 어떤 행위가 자아의 절대적 자립성에 따라서 외부세계에 대한 자아의 모든 의존성을 극복하는 것을 기초로 삼는다면 그 행위는 윤리적이라고 보았다. 철학자 피히테에게 외부세계는 자아의 활동과 자기실현에 대한 저항이자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피히테는 칸트의 인식의 주체를 행위의 주체로 더욱 분명하게 바꾸어 버렸다.

“언제나 너의 의무가 최선이라고 확신하는 데 따라 행위하라.”

그러나 우리의 행위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계는 바로 그러한 실제적인 제약이다. 피히테는 이 세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다

우리는 외부의 사물이 나를 규정하게 내버려 두어 외부 세계에 종속될 수도 있고, 외부 세계의 영향으로 부터 벗어나 내적 자유를 추구할 수 있다. 피히테는 외부세계에 대한 종속은 ‘인간에게 가해지는 최악의 상태’이다. 왜냐하면 외부세계는 자아의 활동의 결과물이므로 자아가 비아인 세계에 의존하거나 제약을 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일체의 외적인 것으로부터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해서는 무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바로 그러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다.

피히테의 철학은 무한한 인간의 자유를 옹호한다. 피히테의 생애를 보면, 그는 자신이 추구한 철학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러한 철학을 선택했는가를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어떤 철학을 선택하는가는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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