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에 경탄한 ‘세계정신’의 구현자

철학여행까페[56]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8.12.0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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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빙겐 신학교를 졸업하고 헤겔은 스위스 베른의 명문귀족 가문인 쉬타이거 집안에서 가정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가정교사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쉬타이거 집안에는 헤겔 말고도 세 명의 가정교사가 더 있었다. 헤겔은 아이들의 교육도 전적으로 맡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이동희
헤겔의 생가.
헤겔은 스위스 베른의 가정교사생활을 하면서 베른의 귀족정치를 가까이 관찰할 수 있었지만 귀족정치와 귀족생활에 대한 혐오와 가정교사로서의 자신의 초라함을 더 느꼈다. 이 시기에 헤겔은 종교에 관한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이 글들은 외면적으로 종교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제도와 경직화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부잣집 가정교사 헤겔

헤겔이 베른에서 썼던 글들은 사회적으로 볼 때 어떠한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낙담한 채 자신이 스위스 촌구석에 틀어 박혀 세상과 고립되어 있다고 느꼈고, 결국 우울증까지 앓게 되었다. 헤겔과 자주 편지를 교환했던 셸링은 헤겔에게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울증에 빠져 있는 상태”를 느꼈다.

횔덜린도 노인네처럼 느렸지만 항상 유쾌하고 명랑했던 헤겔에게서 그러한 성격이 없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두 친구는 헤겔을 그러한 상태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을 했다. 횔덜린의 주선으로 헤겔을 위한 새로운 가정교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횔덜린은 자신이 가정교사로 있던 집안의 친척인 프랑크푸르트의 상점 주인이자 포도주 상인의 집에 헤겔을 소개해 주었다. 헤겔은 이 집에서의 가정교사 생활에 만족해했고, 다시 명랑한 성격을 되찾았다. 프랑크푸르트 시절에 그는 누이의 친구인 나네테 엔델에 대해 매우 깊은 호감을 가지고 사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헤겔은 철저한 루터교 신자였기에 둘 사이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녀와의 관계는 헤겔이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서 끊어지게 된다.

헤겔은 셸링의 도움으로 프랑크푸르트의 가정교사생활을 청산하고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목표로 예나로 온다. 예나에서 그는 <행성궤도론>이라는 교수자격 취득논문을 쓰고, 시간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예나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그에게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났다. <정신현상학>을 탈고할 무렵 그는 나폴레옹을 직접 목격한다. 나폴레옹은 1806년 10월 13일에 예나를 점령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는 나폴레옹을 보고 친구 니이트함머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소감을 나타냈다.

이동희
나폴레옹
“낮에 예나가 프랑스 사람들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황제는 그가 점령한 성벽 안에 나타났다. 나는 정찰을 위해서 말을 타고 도시를 지나가는 황제-이 세계혼(Weltseele)을 보았다. 그러한 개인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기분이다. 그 개인은 한 곳을 집중하며, 마상에 앉아서 세계를 쥐고 그것을 지배한다…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사태의 진전은 오로지 이 비상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이러한 사람에 대해 놀라워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헤겔을 비롯하여 당시 독일의 지성인들은 독일을 침공한 나폴레옹을 오히려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괴테도 나폴레옹에 대해 감탄을 했다. 그는 나폴레옹을 직접 알현하기까지 했고, 나폴레옹을 “나의 황제”라고 까지 부르기도 했다.

음악가 베토벤은 나중에 취소했지만, 나폴레옹을 위한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왜 독일의 지성인들은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침공한 이웃나라의 황제에게 열광하며 감탄을 한 것일까?

헤겔을 비롯한 독일의 지성인들에게 나폴레옹은 독일의 구체제를 타파하고 ‘개인의 자유와 소유권의 불가침성’을 기초로 한 근대적 시민 법전을 전파해 준 위인으로 비쳤다. 1800년대의 독일은 조그만 영주 국가들로 나누어져 봉건적 전제주의가 지배하는 나라였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다수의 선제후들, 94개의 교회 및 세속영주들, 그리고 51개의 자유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산하면 근 300개의 영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농노제는 아직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고, 일부 영주들은 신민들을 용병으로 외국에 대여하거나 팔아 치우기까지 했다.

나폴레옹은 이런 독일의 구체제를 타파하고 프랑스혁명의 이념과 그것에 기초한 나폴레옹 법전을 전파했다. 실제로 나폴레옹의 통치기간인 1806년에서 1814년까지 낙후된 독일은 개혁의 시기를 맞이했다. 라인란트 합병, 베스트팔렌 왕국설립, 바바리아 같은 친프랑스적 독일 연방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개혁이 행해졌고, 프랑스 혁명이 선언한 원리가 채택되었다.

사생아를 두다

헤겔은 이렇게 나폴레옹에 감탄했지만 그의 개인적 야심에 결코 찬동한 적이 없었다. 그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통해 자신을 실현해 가고 있는 세계정신에 감탄을 했을 뿐이었다. 세계정신은 나폴레옹의 야심을 이용해 프랑스혁명의 이념과 ‘만인의 자유’에 기초한 시민법을 유럽에 전파했다. 1814년 4월 파리가 함락되고 나폴레옹이 퇴위해 엘바 섬에 유배되었을 때 헤겔은 이 세계사적 개인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겔은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돌아 왔을 때 그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걸지 않았다.

헤겔은 나폴레옹 군이 쏘는 대포소리를 들으면서 <정신현상학>을 탈고했다. 그리고 헤겔은 이 도시에서 뜻밖에 첫아들을 얻었다. 1807년 2월 5일에 헤겔의 첫아들이 태어났던 것이다. 이 아들은 헤겔이 당시에 하숙했던 집주인의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 여자는 피셔라는 처녀적 성을 가진 크리스티아네 샬롯테 부르크하르트였다.

헤겔의 첫아들은 이 불쌍한 여인이 낳은 세 번째 사생아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루드비히로 정해졌고, 그 아이의 세례식 때에는 헤겔의 아우 게오르크 루드비히 헤겔과 서적상 프리드리히 프롬만이 참석했었다. 그러나 앞날이 창창한 젊은 학자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그것도 남의 부인에게서 아들을 낳은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헤겔은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부인의 남편이 죽어 미망인이 되면 그때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헤겔이 예나를 떠나면서 잊혀졌다. 그리고 나중에 크리스티아네는 실제로 미망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헤겔과 결혼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이동희
헤겔의 정신적 지주이자 아내 마리 헤겔

헤겔은 몇 년 뒤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20살 연하의 아리따운 여성 마리 폰 툭허와 1811년 9월 16일에 결혼했다. 그는 기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이로써 나는 세속적인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 이 세상에 일자리가 있고 사랑스런 아내가 있다는 것 말고 더 바랄 것이 있는가!”

신혼에 빛 발한 철학 탐구

마리는 항상 헤겔을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다보았다. 마리의 이러한 태도는 헤겔이 첫아들을 다른 데서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이는 여자 아이였으나 출생 후 곧 사망하였다. 아들 칼은 85세까지 살았으며, 또 다른 아들 임마누엘은 77세까지 살았다.

헤겔은 결혼생활에 만족했고 행복해 했다. 그렇지만 신혼생활이 헤겔의 철학적 작업까지는 방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헤겔은 신혼생활 동안에 자신의 중요한 철학적 저작인 <대논리학>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헤겔 스스로도 자부심에 차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혼하고 난지 첫 학기 안에 가장 추상적인 내용의 책을 480쪽이나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헤겔의 저작이 점점 알려지면서 헤겔은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로, 그리고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초빙된다. 이제 유럽의 정신사에 거대한 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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