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의 공판지침

[편집인 레터] 김주언l승인2009.03.16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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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7년 ‘보도지침’ 사건 재판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섯 번째 열린 공판에서 변호인단의 증인 신청을 받아들였던 재판부가 돌연 증인 소환을 취소해 물의를 빚었다.

재판부는 4대 일간지의 편집국장 등 23명을 증인으로 채택했지만, 소환장까지 발부했다가 다음날 취소해 버렸다. 이에 대해 변호인단은 증인취소 이유를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조영래 변호사는 “도저히 검은 손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재판정에서가 아니라도 양심에 입각해서 어떤 압력이 어떤 방법으로 들어왔는지 말해 달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휴정을 선언했다가 바로 공판을 속개한 뒤 결심공판을 열겠다며 총총히 퇴장했다.

당시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나는 청와대나 국정원이 재판에 개입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훗날 들은 얘기지만, 당시 증인으로 채택됐던 언론사 간부들은 재판정에 나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실상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려고 했다.

이들의 증언을 거부한 것은 언론통제의 실상이 법정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정권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보도지침’처럼 재판을 통제하기 위한 ‘공판지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년도 넘은 사건을 갑자기 떠올리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사법부가 과거 독재정권을 닮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30년 전 독재정권 시절로 역주행하고 있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터에 신 대법관 파동은 이를 확실하게 증명해준다.

경찰과 검찰을 활용한 인권탄압에다 사법부까지 정부의 시녀로 전락시키려는 징조가 보이기 때문이다. 국정원법을 개정해 국정원의 직무범위를 넓히게 되면 국정원이 정권안보의 첨병으로 나설지도 모른다.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개입 행태는 고구마 줄기처럼 계속 들춰지고 있다. 촛불재판 몰아주기 배당과 이메일, 전화 통화에 이어 특정 판사에 대한 개별 면담 등의 방식을 통해 재판에 개입하려 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더구나 전기통신기본법에 대한 위헌 신청을 기각하도록 유도하는 등 판사들에게 압력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재판 개입은 과거 독재정권의 판결 가이드라인을 닮았다. 독재정권 시절 재판부에는 국정원 직원이 상주하며 공판에 시시콜콜 개입했다. 이제는 정보기관원이 아닌 사법부의 행정 체계를 활용한 것일까.

일선 판사들은 신 대법관의 이메일이나 개별 면담에 압력을 느꼈다고 말한다. 국민여론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7.0%가 ‘담당 법관의 재판에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정당한 사법행정권을 행사한 것으로 별 문제없다’는 의견은 20.7%에 그쳤다. 더구나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외부의 압력없이 독립적으로 재판하고 있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렇다’는 응답이 16.4%,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64.7%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신 대법관의 행동은 과거 독재정권의 판결 가이드라인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촛불재판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려 한 것은 명백한 헌법위반일 뿐더러 위법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법대로 하자는 좋은 뜻이었을 뿐’이었다고 변명한다. 청와대도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토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의 행동을 감쌌다. 입만 열면 ‘법대로’를 외치는 권력의 진앙지인 청와대의 변명치곤 답답하기만 하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사법부를 불신하는 데도 청와대는 오불관언이다. 인명진 목사의 말대로 자신을 반대하면 ‘좌파’로 매도하는 이명박 정부는 절대 다수의 국민을 좌파로 규정지으려 할지도 모른다.

이번 신 대법관 파동을 보고 일부에서는 과거 4차례의 사법파동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법부의 독립을 주창한 젊은 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법부 독립은 아직도 요원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법부 역사에 여러 번의 사법파동이 있었는데 결국 사법부의 독립과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됐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 대법관의 말은 옳다. 새로운 사법파동을 거론하기 보다는 법원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개헌 세미나’에서 임지봉 서강대교수는 '제왕적 대법원장' 제도가 문제의 근원임을 지적했다.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피라미드 구조로 중앙집권화한 관료 체제로 법원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했다”는 것이다. 소신과 기개 있는 판결을 하는 판사들은 법원을 떠나게 하는 것이 바로 관료화한 체제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 설치된 사법개혁위원회는 로스쿨과 배심제를 도입키로 했으나 인사제도의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법관 인사제도의 전면적인 개혁만이 사법부의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다.


김주언 편집인

김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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