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로 살면서 내는 책

책으로 보는 눈 [88] 최종규l승인2009.06.01 11:51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아프리카 트렉>이라고 하는 책은 프랑스사람 둘이서 세 해에 걸쳐 아프리카 땅을 두 발로 밟은 이야기를 담습니다.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책은, 뉴질랜드라는 땅에 살던 토박이를 괴롭힌 영국사람한테 맞서 어머니땅을 지키려고 하던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를 담습니다. 수백 쪽에 이르는 몹시 두툼하고 무겁기까지 한 <아프리카 트렉>을 펼치면서 ‘전쟁무기란 하나도 없이 맨몸으로 땅을 느끼려 한’ 서양사람도 있다고 느끼는 한편, 고작 여든여덟 쪽 짜리 자그맣고 가벼운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을 넘기면서 ‘온갖 전쟁무기 앞에서 맨손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며 맞선’ 살결 검은 사람들 삶을 느낍니다.

오늘날 우리들 살결은 귤빛이나 살구빛이 아닌 흰빛이라 할 만합니다. 지난날 개화기라고 하는 때 서양사람이나 일본사람이 담은 한겨레붙이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누런 살’(황인종)이 아닌 ‘검은 살’이곤 합니다. 왜냐하면, 나라살림 휘어잡고 여느 사람들 위에 올라선 몇몇 힘있는 사람을 뺀 거의 모든(95%가 넘는) 가난한 사람들은 땅에 발을 붙이고 몸을 누이고 손발을 놀리면서 땀 흘려 일했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아프리카 땅이든 아시아 땅이든 흙에 뿌리내려 햇살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 살결은 ‘까맸’습니다. 먼 옛날이 아닌 우리 어릴 적을 되뇌어 보아도, 허구헌날 바깥에서 온몸이 ‘새까맣게’ 타서 벗겨지도록 놀던 일을 떠올리면 우리 살결은 ‘누런’ 빛조차 아닌 ‘까만’ 빛이라 할 만함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책방마실 두 군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온몸이 부서질 듯 힘겹고 고단합니다. 가방에 가득한 책을 바닥에 풀어 놓고 찬물로 씻고 빨래를 합니다. 빨래는 빨랫줄에 널어 놓은 다음, 집으로 오는 길에 펼치고 넘긴 책은 덮어놓고, 사진기 한 대 어깨에 걸치고 뒷주머니에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쑤셔넣고 밖으로 나옵니다. 잠깐 숨을 돌리자면서 골목마실을 하기로 합니다. 오늘은 창영동에서 유동으로 접어든 다음 율목동을 걷습니다. 정보산업고(예전에는 상업고) 울타리 옆으로 10m 남짓 파헤쳐진 길은 새로운 길을 닦는다고 공사가 한창입니다. 사람들 걷는 길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지 오래이지만, ‘어차피 자동차길로 바꿀 텐데 뭐하러 거님길을 판판히 다지느냐’면서 내팽개쳐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팽개쳤기 때문(?)에 공사터와 거님길 사이 아주 작은 틈바구니에 씨앗 하나가 뿌리내리고 줄기를 올려, 어느새 1미터쯤 되는 높이로 자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군요. 나무를 보며 깜짝 놀랍니다. 넌 언제부터 이렇게 자란 채 있었느냐?

한 시간 남짓 골목골목 천천히 걸으면서 돕니다. 늘 돌던 길이지만 돌 때마다 새롭고, 돌 때마다 새롭게 사진을 찍습니다. 한 시간 사이에 예순 장쯤 사진을 찍었고, 집으로 돌아와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며 혼자서 코끝이 찡합니다. ‘그래, 우리는 프랑스 사람이 아프리카를 세 해에 걸쳐 돌았던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바로 우리 스스로 살아가는 자리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삶을 느낄 수 있지 않겠니? 마오리족이 영국사람한테 짓밟힐 때 남긴 이야기가 무엇이었겠니?’

그렇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풋풋하고 살냄새 나는 사람 삶터’가 그립다며 비행기 타고 나라밖 나들이만 멀리멀리 떠납니다.


최종규 1인 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내는 사람

최종규  

<저작권자 © 시민사회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종규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여백
시민사회신문 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8288 서울특별시 구로구 새말로 93, 신도림태영타운상가2동 B105  |  대표전화 : 02-3143-4161  |  팩스 : 02-6737-1115  |   ingopress@ingopress.com
등록번호 : 서울 다 10706  |  등록일자 : 2013년 8월 26일  |  회장·논설주간 : 강상헌  |  발행·편집인 : 설동본  |  편집국장 : 양병철
후원계좌 : 국민은행 7788-01-04-375819 (시민사회신문)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설동본
Copyright © 2007 시민사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