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보수가 87년 헌법의 역전을 지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97년 체제의 영향 하에서 보수는 헌법에 시장주의적 원칙, 사적 소유의 원칙, 정부의 부당한 개입의 금지원칙 등을 더욱 명확하게 규정하고자 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개헌 의제화를 억압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전략 때문에, 이러한 ‘헌법의 보수적 개정’ 요구를 공개화하지 못하는 역설적 딜레마에 처해 있다고도 한다. 진보는 최소주의적 사회적 개헌안을 만들어서 공론화하는 것을 하나의 방법이라고 고민한다.
최근 민주화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87년체제 관련 학술토론회에서 박명림 연대교수는 4년 단임제 개헌을 제안했다. 국회 원희룡 의원 역시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조국 서울대 교수도 언론 기고문을 통해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의 비민주적 요소들을 보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현행 헌법이 제정된 이후 22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모순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은 아무도 부인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상황인식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작금 많은 국민은 대통령이 헌법위반 행위를 거듭하고 있다며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우선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한다. 지금은 섣불리 헌법 개정 운운할 단계가 아니라는 얘기다.
대통령 주변의 정치권에서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구상들이 설왕설래하고 있다. 내각개편도 탁상에 올라있다. 그러나 현 정권의 역사관과 현행 헌법이 충돌하고 있다면 내각을 교체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6월항쟁의 결과물인 현행 헌법 제1조에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직접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국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공직자는 국민의 뜻을 하늘과 같이 받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문제는 현행 헌법이 민주주의를 간접민주주의를 통해 실현하려 했다는 점이다. 현행 헌법은 간접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주권자인 국민이 선거를 통해 한시적으로 자신의 주권을 선출직 공무원들에게 위임하고, 법률제정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간접민주주의 제도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국시이자 근간인 직접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편의상’ 채택한 수단에 불과하다. 직접민주주의가 간접민주주의와 충돌할 때에는 탄핵을 통해 이를 바로잡든가, 불가피할 경우 국민에게 저항권이 주어진다는 것이 정치학의 지배적 학설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가 심하게 충돌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직접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고 현행 헌법을 성실히 지키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머슴’다운 행태다.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이 현행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힐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런 요구에 대한 매듭을 짓는 것이 선결과제다. 그러기도 전에 현행 헌법 개정 운운한다는 것은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헌법위반 세력들에게 면죄부를 줄 우려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시민사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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