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권력이다

철학여행까페[83]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10.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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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푸코
1962년에 푸코는 클레르몽-페랑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임상의학의 탄생>과 <죽음과 미로: 레몽 루셀의 세계>를 출판했다. 그는 이번에는 의학 체계가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의 의학 분야의 담론을 분석하고자 했다.

그는 병원에 고고학과 계보학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9세기 임상의학적 담론의 탄생을 재구성하고자 했다. 근대 의학은 어떻게 질병을 효율적으로 인식하고 분류하고 정의하는가? 이 과정을 탐구해보면 임상의학과 국가와 제도, 사회와 담론의 관계가 어떻게 작용하는가가 드러날 것이다. <임상의학의 탄생>은 정신분석학자 라캉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1965년에 군사정권이 들어 선 브라질로 가서 그는 2개월간 강의를 했다. 그는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반민주와 싸우기 시작한다. 같은 이유로 그는 1966년에 다시 프랑스를 떠나 튀니지로 갔다.

떠나기 전에 출판한 <말과 사물>은 마치 빵집의 모닝빵처럼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이 잘 팔리자 <누벨 옵세르바퇴르>지는 아예 기사 제목을 ‘모닝빵 같은 푸코’로 뽑았다.

이 책의 초판은 일주일만에 매진되었다. <말과 사물>의 부제는 인간과학의 고고학이다. 푸코는 이 책에서 광기의 역사에서 다루었던 같은 시기를 다루면서 인간에 관한 학문들을 출현시킨 개념적 배경을 규명한다.

모닝빵같은 푸코의 책

그는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풍자적인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보르헤스의 단편에 나오는 <어떤 중국 백과사전>을 인용한다.

이 백과사전은 동물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①황제에 속하는 동물 ②향료로 처리하여 썩지 않게 보존된 동물 ③길들여진 동물 ④젖을 빠는 돼지 ⑤물고기 ⑥전설상의 동물 ⑦주인 없는 개 ⑧현재의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⑨광포한 동물 ⑩셀수 없는 동물 ⑪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⑫기타 ⑬물주전자를 깨드리는 동물 ⑭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이 중국의 동물 분류는 <산해경>에 나온다. 푸코는 이 익살스런 동물 분류를 보고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류체계가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중국의 동물분류와 다르게 현대 서구인들의 어떻게 현상을 질서 지우고, 어떻게 사유하는가라는 물음을 이끌어 낸다. <말과 사물>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사물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다 질서를 부과하는 과정을 파헤치고 있다.

<말과 사물>을 출판한 해에 푸코는 현상학 비판으로 사르트르와 2년간 논쟁을 벌였다. 사르트르는 푸코에게 있어 적이자 스승이었으며 동지였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푸코는 사르트르의 후계자였다.
푸코는 몇 번의 인터뷰에서 사르트르를 공격했다. 그는 ‘인간의 죽음’을 주장하고 사르트르 형태의 휴머니즘과 의식철학에 대해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했다. 그는 1966년 6월에 행한 인터뷰에서 사르트르를 이렇게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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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이주자문제와 관련한 시위에 참가한 푸코(확성기를 든 사람)과 사르트르

“<변증법적 이성비판>은 20세기를 사유하려는 19세기 인간의 놀랍고도 눈물겨운 노력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마지막 헤겔주의자이고 맑스주의자입니다.”

사르트르도 푸코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는 <말과 사물>이 성취한 바를 인정했지만 푸코를 부르주아지의 마지막 옹호자로 보았다.

“그가 겨냥한 것은 맑스주의이다. 그의 관심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 것,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가 맑스에 대항해 세울 수 있는 마지막 댐을 건설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이렇게 빈정댔다.

“부르주아지는 불쌍하기도 하지. 자신들을 지킬 성채가 고작 내 책밖에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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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푸코(왼쪽)
푸코는 <말과 사물>의 후광 속에 튀니지로 떠났다. 그가 튀니지로 간 것은 더 이상 클레르몽-페랑에서 가르치기 싫어서였다.1968년 5월 혁명을 그는 튀니지에서 맞았다. 튀니지도 학생운동의 열기 속에 휩싸여 있었다.

좌파 학생들은 튀니지를 가능한 한 빨리 근대화시키려는 친미정권에 대항해 연일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 했던 학생들은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다. 푸코가 가르치던 제자들도 투옥됐다. 그는 쫓기는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지 않도록 자기 아파트에 숨겨 주기도 했다.

사회 속으로 뛰어들다

1968년 말 푸코는 프랑스로 서둘러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본격적인 정치적 행동에 돌입했다. 급진적 활동에 참여했고, 거리에 나가 격렬하게 시위를 했다. 그러다가 여러 차례 체포되기도 하였다. 푸코는 급진적인 철학자들을 모으고 좌파 학생들과 행동을 함께 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 스페인, 이란, 폴란드 등의 정치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푸코는 68혁명의 결과로 생긴 파리 제8대학인 뱅센느 실험대학의 철학과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 멋대로 행동하는 극좌파 학생들과 맞서 쇠파이프를 들고 싸워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과 더불어 실험대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교육부에 가서 점거 농성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을 체포하러 온 경찰과 싸우기도 했다.

1970년에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취임해 ‘사상체계의 역사’ 분야를 담당하였다. 임명된 이후에도 그는 공개강좌를 통해 반체제운동에 힘을 쏟았다. 이 해에 <지식의 고고학>이 출간되었다.

1971년에 그는 사르트르와 함께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1971년과 1972년에 감옥 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폭동을 계기로 감옥수감자들의 인권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푸코는 수감자들과 감옥들의 상황을 연구하고 개선할 목적으로 이 해에 ‘감옥정보’(GIP)클럽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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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자 문제와 관련한 시위장에서의 푸코

이 클럽에 사르트르, 들뢰즈가 가입했다. 이때부터 푸코는 감옥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75년에 발간한 <감시와 처벌>은 처벌의 형식으로서 감옥의 기원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푸코는 사회 곳곳에서 미시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제시했다. 그가 말하는 권력은 정치권력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힘의 관계를 뜻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인간들의 모든 관계 속에 내재되어 있다. 마치 모세혈관과 같이 권력관계는 사회 구석구석까지 망을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말하는 미시권력이다.

푸코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의 권력분석이 그 어떤 정치적 행동의 가능성도 부인하는 막다른 골목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푸코는 정치적 저항은 당위라고 주장한다. 권력 관계는 저항을 통해 변화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푸코의 권력이론은 구조주의 및 후기 구조주의 이론, 페미니즘,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등에 다각도로 영향을 끼쳤다. 1968년 이후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푸코가 규정한 자신의 과제는 그의 실천적 지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조용히 혹사하는 체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실체를 폭로하고, 그것을 변화시키고, 전복시켜야 한다. 내가 저술 작업에서 할 일도 바로 그런 것이다.”

1976년에 푸코는 권력-지식의 연계를 다룬 책 <성의 역사>1권을 출판한다. <성의 역사> 1권은 ‘앎의 의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세운 가설은 “성은 억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성의 역사는 오히려 선동과 증대의 역사다. 억압 대신 선동과 증대가 이뤄지고 거기로부터 수많은 성에 관한 ‘담론’이 생겨났다. 어찌 보면 사소할 수도 있는 ‘성’에 관한 담론을 급격하게 증가시킨 것은 고해성사, 성의학 , 정신분석학 등 수많은 지식들이었다. 이제 성담론은 정신분석가, 정신의학자, 범죄자, 성도착자, 재판관 등과 연관되면서 권력 문제로 등장한다.

역작 <성의 역사> 발간

푸코는 1978년에 기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혁명 전야의 이란을 두 번씩 방문해 반체제 인사들과 학생 운동의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이란에서 보고 들은 바를 이탈리아 잡지 <코리에레델라세라>에 이란 혁명에 관하여 몇 가지 기사와 보고서로 기고하였다. 그는 호메이니에 의한 이란 혁명과 이슬람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리포트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호메이니 역시 종교 독재자였다.

80년대부터 푸코는 고대의 윤리로 연구 방향을 전환했다. 푸코는 1983년부터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1984년에는 <성의 역사-쾌락의 활용> 2권과 <성의 역사-자기에의 배려> 3권이 출간되었다. <성의 역사> 1권과 상당한 시간 차이를 두고 발행된 2권과 3권은 기독교 권력이 고착화되기 이전의 고대 그리스-로마의 성 윤리를 다루고 있다. 그는 고대 이교도의 사례들을 들어 ‘성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라고 하는 자신의 주장을 더욱 풍부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1984년에 푸코는 건강이 나빠져 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푸코는 1984년 6월 25일 57세의 나이로 파리의 살페트리에르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고 난 후 수 백명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이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병원 영안실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푸코의 오랜 친구이자 뛰어난 철학자인 들뢰즈도 있었다. 푸코의 장례식에서 들뢰즈는 흐느낌을 겨우 참아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성의 역사>마지막 두 권의 서문을 읽었다. 이 두 책은 푸코가 투병기간 내내 썼던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의 출간을 죽기 직전에 볼 수 있었다.

그가 죽고 나서 그의 논문들과 모든 작품들을 모은 전집 <말한 것과 쓴 것>이 출판되었다. 푸코가 썼던 많은 책들은 그의 개인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푸코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을 한 적이 있다.

“경험에 근거해 사고한다”

“나는 직접적, 개인적 경험에 의해 영감을 얻지 못한 채로는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최소한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어야만 했다.”

장례식에서 들뢰즈가 읽었던 서문은 어쩌면 푸코의 개인적 관심사와 학문적 관심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내 작업의 동기는 아주 간단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토록 끈질기게 작업에 몰두했던 나의 수고는 단지 호기심. 그렇다.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 주는 그런 호기심이다… 우리 인생에는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라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그런 순간들이 있다.”
<푸코 편 끝>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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