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이 강한 돌을 이긴다-아렌트[2]

철학여행까페[89]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l승인2009.12.2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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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1933년 체코를 거쳐 파리로 망명했다. 파리로 망명하기 전 그녀는 결혼을 했다. 결혼 상대는 마르부르크 대학 철학과 동기인 유대인 귄터 스테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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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와 권터 스테른
그녀는 1929년에 베를린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들은 7개월 간 동거 생활을 하다가 그 해에 결혼하였다. 귄터 스테른은 철학교수를 지망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재능이 있었지만, 유대인에 대한 비우호적 분위기 탓에 교수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언론과 문필생활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귄터 안데르스라는 필명으로 알려졌다.

아렌트는 베를린에서 머무는 동안 한 유대인 여성의 삶을 다룬 <라헬 파른하겐: 한 유대인 여성의 삶>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1938년 망명지인 파리에서 완성되어 1958년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라헬 파른하겐, 또다른 자아

아렌트에게 이 흥미로운 유대인 여성을 소개해 준 사람은 친구 안나 멘델스존이었다. 아렌트가 쓴 이 책에는 유대인 여성, 역사, 사회 등 여러 가지 측면이 중첩적으로 깔려 있었다. 그녀는 사회적, 심리적 측면에서 라헬의 인생 중 많은 부분에 공감했다. 그녀는 이 여인의 전기에 자기의 심정을 이입해 놓았다. 이 책의 밑바닥에는 독일인 하이데거와 유대인 여성 아렌트와의 사랑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깔려 있다.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하이데거의 주술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렌트는 라헬 파른하겐의 여성을 통해 유대인으로서의 자각과 동시에 역사와 정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렌트는 독일사회에 결코 동화될 수 없었던 라헬 파른하겐이라는 유대인 여성을 통해 유대인으로서 ‘현실’의 문제에 눈을 떴다.

아렌트는 베버가 유대인과 관련해 처음으로 썼던 개념인 파리아(Paria, 국외자)를 사용하였다. 파리아는 독일의 동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결코 동화될 수 없었던 유대인을 뜻한다. 그러면 파리아로서의 라헬 파른하겐은 어떠한 여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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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 하른하겐
라헬 파른하겐은 18세기에 실존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19세기 베를린에서 슐라이어마허, 슐레겔, 훔볼트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을 상대로 살롱을 경영했다. 그녀는 독일인 귀족 아우구스트 파른하겐과의 결혼을 통해 유대인이라는 출생을 지우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러한 시도가 헛된 망상이었음을 깨달았다.

독일사회의 부르주아 계급은 그녀를 결코 수용하지 않았고, 귀족들은 그녀를 멀리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결코 동화될 수 없는 유대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화되지 않은 유대인으로서 라헬은 동화된 유대인인 파브뉴(parvenu) 보다 현실이 어떤 것인지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아렌트는 책의 말미에서 동화주의를 통한 유대인 배제 정책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전체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적대적인 사회에서-그리고 이 상황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모든 나라들에 해당한다-동화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반유대주의에 동화되는 길 밖에 없다.”

라헬은 이러한 동화를 거부했고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수용했다. 아렌트는 이 여성을 통해 유대인 여성으로의 삶을 이해하고, 그 여성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라헬은 아렌트의 ‘또 하나의 자아’였다.

아렌트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역사와 정치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맑스, 트로츠키를 읽었고, 베를린 정치대학교의 유대인 교수들과 자주 만났다. 1932년에 그녀는 <독일의 유대인 역사>(Geschichte der Juden in Deutschland)라는 잡지에 <계몽주의와 유대인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아렌트는 주로 헤르더의 입장을 따라 유대인의 문제를 서술했다. 그녀는 보편적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의 태도에 대항하여 개개인과 민족에 필요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헤르더의 입장을 지지했다.

1933년에 히틀러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독일의 상황은 매우 위험했다. 그녀는 1932년에 이주할 것을 고민했지만 베를린에 남기로 했다. 그녀의 남편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알려진 독일의회 방화사건 때문에 1933년 봄에 파리로 이주했다.

베를린에 혼자 남게 된 그녀는 반유대주의적인 조치가 시행됨에 따라 더욱 시급해 진 시온주의 운동 일에 열중했다. 그녀가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적이 된 것은 1926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시온주의자 쿠르트 블루멘펠트의 영향이 컸다. 그는 그녀의 정치적 멘토였다.

블루멘펠트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그녀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를 히틀러 체제에 반대했던 시온주의 운동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은신처로 제공했고, 그들의 도주를 도왔다.

결국 그녀는 1933년에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귀가하던 중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다행스럽게 별다른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8일 만에 풀려났다. 그녀는 더 이상 독일에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고 느껴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파리로 망명했다.

파리에서 그녀는 잠시 UN기구에서 일하다가 다시 세계 시온주의자 조직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시오니즘은 고대 유대인들의 고향이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이다.

그녀는 파리에서 남편과 재회했다. 그러나 그들의 부부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귄터 슈테른이 1936년에 뉴욕으로 떠나면서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났다. 아렌트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 두 번째 남편이 되는 하인리히 블뤼허와 만났다. 그는 1919년 스파르타쿠스 폭동에 가담했던 비유대인 공산주의자이자 독일 공산당의 창설자이기도 했다. 하인리히 블뤼허가 1940년 전처와 이혼하고 난 다음, 그녀는 그와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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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무국적자로서의 삶


그녀는 프랑스에서 1933년부터 1941년까지 머물렀다. 그러나 무국적자로서의 프랑스 생활은 안전하지 못했다. 1938년 봄 프랑스 정부는 반 외국인 칙령을 공포했다. 1939년에는 적대국가인 독일국민을 감금하는 시행령을 실시했다.

1940년 5월에 블뤼허와 아렌트 부부는 체포되어, 아렌트는 스페인 국경 근처 귀르(Gurs)의 여자 수용소로 보내졌다. 블뤼허는 행방이 막연했다. 모든 것을 압수당한 채 여자 수용소에서 아렌트는 베를톨트 브레히트가 <노자가 국경을 넘어가는 길에 쓴 도덕경에 관한 전설> 을 되뇌이며 희망과 위안을 받았다.

“흐르는 부드러운 물이 시간이 지나면 힘 있는 돌을 이긴다오.”

아렌트에 따르면,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이 시를 복음을 전파하듯 입에서 입으로 옮겨 이 시가 마치 들불처럼 수용소에 퍼졌다고 한다. 이 시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이 친구 브레히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미출간 시였다. 이 시를 벤야민은 아렌트에게 들려주었고, 아렌트는 그것을 암기했었다.

아렌트부부는 베를린 시절부터 벤야민을 잘 알고 지냈다. 아렌트는 벤야민을 하이데거와 같이 ‘시적인 사상가’로 여겼다. 아렌트 부부는 1939년과 1940년에 벤야민과 유대교 신비주의에 대해 논의를 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발터 벤야민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게르숌 숄렘의 유대교 신비주의와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와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교유했다.

그는 일회성, 창조성 등 전통적 예술작품의 이해에 대항하여 복제 가능한 기술 발전의 시대에 있어 예술작품의 의미를 통찰하고자 했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 영화 등 새로운 기술과 예술형식이 가지고 올 사회 효과와 변화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의 예술이론은 현재에 매체 미학으로 다양하게 조명되고 해석되고 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블뤼허와 아렌트는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다. 두 사람은 안전하지 못한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를 피해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아렌트 부부는 1940년 마르세유에서 구금에서 풀려 난 벤야민를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벤야민에게 뉴욕 사회조사연구소의 동료들이 그를 위해 미국행 긴급비자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벤야민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역사철학에 관한 테제>를 포함하여 원고 모음집을 맡겼다.

아렌트 부부는 나중에 벤야민이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40년에 벤야민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프랑스를 몰래 떠나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가고자 했다. 프랑스 출국허가서를 가지고 있지 않던 그는 소규모의 사람들과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를 탈출해 스페인으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스페인 국경 마을 포르부(Port Bou)에 도착하자 세관원은 스페인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벤야민은 절망한 나머지 국경에서 음독자살했다. 그가 음독자살한 것에 마음이 움직인 국경선의 세관원은 그의 일행들을 모두 통과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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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묘
벤야민의 자살


아렌트 부부는 미국행 비자를 얻어 1941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들은 벤야민이 맡긴 <역사철학에 관한 테제>와 다른 원고를 미국의 뉴욕의 사회조사연구소로 가지고 갔다. 그들은 <역사철학에 관한 테제>를 뉴욕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서로에게 읽어 주고 주변사람들에게도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 아렌트는 죽은 친구를 위해 그의 이름의 이니셜을 딴 <W.B.> 이라는 시를 썼다.

‘언젠가 땅거미 지는 저녁이 다시 오고/별들에게서 밤이 떨어져 내릴 때/우리의 몸을 활짝 피고 누워 있겠지요/가까이에서든, 먼 곳에서든…

멀리서 들리는 소리, 가까이에 있는 걱정/죽은 자들이 내는 모든 소리/그들은 우리를 깊은 잠으로 인도하기 위해/우리가 전령으로 먼저 보낸 사람들이지요.’

아렌트에게 벤야민의 죽음은 파리아로서의 유대 지식인의 비극적 운명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앞으로 아렌트가 이론적으로 힘겹게 싸워야 할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구스타프 슈바브 그리스로마신화\' 역자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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