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공동체는 밥상 공동체다

대선주자에게 보내는 평화담론[4] 김승국l승인2007.08.1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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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平和)=밥(米)+입(口)+균등(平)+나눔(和)
“인간은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

1)동양의 담론

평화(平和)는 동양사회에서 기본적으로 ‘밥(米)을 사람들(口)에게 균등하게(平) 나누어준다(和)’는 것을 의미한다.(한국평화미래 연구소 출범식 자료집, 2007. 7. 7, 5쪽)

밥이 공평히 나누어지는 곳에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 곳은 밥이 공평히 나누어지는 세상일 것이다(김대묵 ‘예수의 밥상공동체에 나타난 공동체 영성 모색’ 성공회대 석사 논문, 2006 80쪽)
이에 주목한 공자·맹자는 요·순과 같은 성군(聖君)이 백성들에게 평화의 밥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성군 대망론’을 제창했다.

김상택 기자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평화공동체 안에서 격양가를 부르는 ‘절성기지(絶聖棄智·성인과 지식을 버림)의 태평성세’를 구가한다. “나라는 작고 백성도 적다(小國寡民). 그러므로 여러 가지 기물이 있으나 쓸 필요가 없고, 백성들은 죽을 때까지 공동체에서 유리되지 않도록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으나 탈 곳이 없고, 비록 무기가 있으나 쓸 일이 없다(雖有甲兵無所陳之). 사람들은 옛날처럼 새끼줄로 의사표시를 하게 했지만 그들의 음식을 달게 먹고(甘其食), 그들의 옷을 아름답게 입고(美其服) 그들의 거처를 안락하게 여기며(安其居), 법이 아니라 옛 풍속대로 즐거워한다(樂其俗). 이웃 나라는 서로 바라보이고(隣國相望) 개짓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를 듣지만 백성들은 죽을 때까지 지역공동체를 오고가지 않는다.”(老子, 80장)

무기가 있으나 쓸 일이 없는 소국과민의 태평세상에서 음식을 달게 먹고 옷을 아름답게 입고 거처를 안락하게 하며 옛 풍속대로 즐거워하는 게 잘사는 평화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는 소규모 지역자치 공동체에서 ‘평화의 밥을 먹자(甘其食)’는 노자의 말씀은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21세기의 지구촌 공동체에서 평화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민초들이 경청할 만한 명언이다.

전쟁 없는 세상에서 겸애(兼愛)하자고 갈파한 묵자는 ‘천하에 남이란 없다(天下無人)’는 대동(大同)사회에서 ‘평화의 밥’을 골고루 나누어 먹자고 부르짖었다.

부국중리(富國重利) 주의자인 관자는 “창고가 실해야 예절을 알고(倉?實則知禮節)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衣食足則知榮辱)”고 말했다.(관자, 권23) 의식(衣食)이 족해야(밥을 배불리 먹어야) 예(禮, 종법사회의 평화를 유지하는 기틀)를 안다고 설파한 것이다.

앞에서 춘추전국 시대의 현인들이 ‘평화의 밥을 골고루 먹으며 잘사는 평화’를 언급했지만 시공간적으로 먼 느낌이 든다. 고대 중국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곁의 시공간에서 이러한 담론을 음미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김지하 선생의 ‘밥상 공동체’론이다.

그는 ‘밥’이라는 책에서 ‘독점자들의 독점 때문에 살맛이 안 난다. 배는 부른데 살맛이 안 난다. 먹을 것은 많은데, 살맛이 안 난다’고 말했다. 그 상황은 현재의 한국사회를 빼어 닮았다. 신자유주의의 10 대 90의 사회에서 10에 해당되는 독점자들이 독점하기 때문에 살맛이 안 나는 국민들이 태반이다.

외형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 국민들의 배는 부른데 살맛이 안 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먹을 것이 많은데도 살맛이 안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이유를 밝히며 대안을 세워야 잘 사는 평화의 길이 열린 텐데 대선의 예비후보 누구도 이 정도까지 육박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전무하다.

신자유주의-한미 FTA체제에서 소외받는 90의 민중들이 헛배 불러 살맛이 안 나는 현상을 타파하는 게 잘 사는 평화의 지름길, 한국 사회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런데도 이 길로 국민을 안내하는 예비주자가 눈에 띠지 않는 대선이 살맛을 잃게 한다.

2)서양의 담론

‘평화가 밥’은 동양식 어법이며, 서양식 어법은 ‘평화는 빵’이다. 이 ‘평화는 빵’ 어법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경전이 성서이다. 성서의 곳곳에 하나님 나라에서 평화의 밥을 먹는 밥상 공동체 이야기가 나온다. 성서의 ‘하나님 나라와 밥상 공동체’ 담론을 박재순 교수의 저서 ‘예수운동과 밥상 공동체’(서울, 천지, 1988)를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밥상 공동체 운동이다. 예수의 밥상공동체 운동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아래와 같은 예수 사건들을 새로운 눈으로 해석해야 한다;

① 죄인들과의 밥상 교제(마가복음 2장 19절)
예수는 수탈과 압제의 현장에서 죄인들과 밥상 공동체를 이뤘다. 예수가 자신을 ‘잔치집 신랑’으로 비유한 것은 예수 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이 잔치를 벌이는 것 즉 밥상 공동체 운동이었음을 말해 준다.

② 오병이어(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사건(마가복음 6장 41~44절)
예수는 굶주린 군중들에게 밥을 나누어주는 나눔의 기적을 일으켰다. 예수가 민중들과 함께 밥을 나누어 먹은 이야기는 당시 상류 귀족들의 잔치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 나눔의 공동체에서 나누면 나눌수록 사랑과 유대는 깊어지고 삶이 풍성해진다.

③ 부자와 밥상 공동체 운동(마가복음 10장 17~22절)
예수는 항상 부자들에게 재물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도록 촉구한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밥상 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④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죽음은 대속적인 죽음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죽음은 밥상 공동체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예수의 몸은 함께 나누어 먹는 밥이며, 예수의 피는 함께 나누어 마시는 포도주다. 예수의 존재 자체가 밥상 공동체(운동)로 육화(肉化)된 것을 의미한다.

⑤ 하나님의 해방운동
밥상 공동체 운동은 단순히 밥을 함께 먹은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중심에서 해방되어 참된 화해의 공동체를 이루는 운동이다. 이 운동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거부하는 반민주적인 사회체제·특권층에 저항하는 민중해방 운동이기도 하다. 이 운동은 민중의 사회적·역사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며, 억압하고 수탈하는 사회체제를 근원적으로 혁신하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 운동이다.

박재순 교수가 보기에 ‘인간이 더불어 사는 사회적 존재라면 인간 공동체는 어쩔 수 없이 밥상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밥을 나누어 먹는 곳이 하느님 나라요, 밥을 독점하는 곳이 지옥이다. 인간은 밥을 독점함으로써 하느님을 떠났고 밥을 나눔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간다. 밥을 독점함으로써 타락한 인간 역사는 밥을 나눔으로써 구원된다.’(박재순 ‘민중신학과 씨알사상’, 서울, 천지, 1990, 143쪽)

살맛’이라는 것이 곧 ‘밥맛’
김지하의 저서에 나오는 ‘밥상 공동체’


최해월 선생은 “밥 한 그릇이 만고의 진리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여공·한 며느리·한 부엌데기 여성에 의해서 그리고 수없는 남성 농민들에 의하여 벌판에서·논에서·밭에서, 그 암흑 속에서, 굶주림과 천대 속에서, 힘겨운 노동에 의해서 생산되어 만들어진 ‘밥’-밥은 한울님의 기본 사업인 ‘일’, 즉 생명활동 그 자체이며 그 생명활동의 결과요 결정이므로, 곧 영구불변한·영원불멸한 ‘도’(道) 그 자체라는 말이올시다. ‘진리’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밥’, 칠곡, 분도출판사, 1984, 53쪽)

한울님의 그리고 생명의 활동은 일, 밥 그리고 일의 ‘창조적인 순환’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울님과 생명의 활동은 ‘일-밥-일’의 창조적 순환입니다. 밥은 물질적인 밥인 동시에 정신적인 밥, 정신의 밥입니다. 영의 밥입니다. 그래서 밥을 우리는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밥은 바로 통일을 의미하는 생명입니다. 생명 곧 통일이며, 생명 곧 밥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나는 밥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즉, 하늘의 밥이요, 그날그날의 민중들이 고되게 노동해서 거두어서 먹는, 그래서 다시 일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그 밥인 것입니다.(60~61쪽)

그러면 밥은 어떻게 생산하는가? 밥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혼자서 생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협동적으로 생산하며 공동체적으로 생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생산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소비에 있어서도, 그것의 수렴, 먹는 활동, 식사에 있어서도 밥은 여럿이 먹는 것, 공동체적으로 먹는 것입니다. 밥은 ‘밥상’에서 먹는 법입니다. 밥상이라 하는 것은 여럿이서 둘러앉아 먹은 공동체 생활을 말합니다. 따라서 ‘밥상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73쪽)

식사와 노동, 노동과 식사에 있어서 공히 밥상 공동체 또는 노동 공동체(두레)에서 나타남과 같이 밥은 공동체적으로 생산하고 공동체적으로 그것을 수렴해서 나누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에 있어서도 설위(設位)과정 전체가, 즉 위패를 놓고 거기에 멧밥을 뜨고 차리고 인사하고 음복하는 일체의 과정과 그 뒤에 나누는 과정, 나누어 먹는 과정이 또한 공동체적입니다. 식사와 제사를 아우르는 밥을 통해서 우리가 인식하는,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생명운동, 생명의 회복과 생명의 본성을 인식하는 생명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도 공동체 운동이며 새로운 공동체 건설 운동인 것입니다.

“혼자서 밥을 먹으면 밥맛이 없다”는 말의 뜻은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밥맛이 없는 이유는 바로 ‘독점’때문입니다. 독점자들과 소유욕이 강한 자들, 제국들, 대제국들, 오늘날에 있어서 서구 블록이-이와 같이 식사와 제사를 분리시켜 이원적으로 인식하게 하며 거기서 확보된 틈을 통해서 생명의 밥을 약탈·독점하고 그것을 혼자 처먹어 온 그 결과로, 오늘날 서구나 동구의 온갖 형태의 모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위 한마디로 “살맛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배는 부른데, 살맛이 안 난다” 또는 “먹을 것은 많은데, 살맛이 안 난다” 이 ‘살맛’이라는 것이 곧 ‘밥맛’입니다. 왜냐하면 밥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밥맛이 없다는 것이 살맛이 없다는 것이고 살맛 안 난다는 것이 밥맛 안 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식사와 제사는 분리해서 보고...거기서 만들어진 틈을 통해서 생명을 약탈하여 혼자서 독점하는 그러한 ‘구조’(이 구조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제3세계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제3세계의 민중운동과 공업사회에서 일고 있는 반전·반핵·.평화운동은 결국은 하나의 문제로 밥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통해서만 하나로 아우러질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밥맛’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고 ‘살맛’을, 생명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75쪽)


김승국 평화운동가

김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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