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운동이 패배하면 비주류도 주변화됩니다”

조희연-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 탐방(8-하)무토 이치요우 조희연 이영채l승인2011.12.2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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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회운동은 8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해왔으며 수많은 단체들이 출현했다. 하지만 무한 상승곡선을 그릴 것으로 예상했던 한국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도 여러 지점에서 발전의 '병목지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일본의 사회운동은 대체로 '실패의 역사'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으며, 실패의 역사라는 피상적 인식 이면에서 전개되어온 건강한 운동들은 정체기로 진입해가는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와 일본 사회운동을 전공하는 케이센대학교의 이영채 교수가 일본 사회운동의 중요한 전환점과 위기의 지점들에 대해서 성찰적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활동가나 학자 등을 두루 만나 연쇄 인터뷰를 진행했다.

호사카 노부토(사타가야 구청장), 가와사키 아끼라(피스보트 공동대표), 토리이 잇페이(노동운동가), 아하시 마사아키(학자), 요시다 유미코(생협운동 이사장), 우쯔미 아이코(평화운동가), 무토 이치요(신좌파 활동가), 우에무라 히데키(인권활동가) 등이다.

첫 순서는 지난 7월에 진행된 호사카 노부토 구청장과의 인터뷰이며, 편의상 두 교수의 질문은 구분하지 않고 '조희연+이영채(조+이)'로 통일했다.

이 인터뷰는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프레시안과 함께 연재하는데, <시민사회신문>의 발행주기에 따라서, 2번의 인터뷰를 함께 싣는다. 편집자

무토 이치요우.

일본의 68혁명과 70년대 일본 운동의 퇴조

조+이: 60년대 후반은 서구에서 68혁명이 나타나는 시기이고,이전 운동과는 다른 결을 갖는 운동이 출현합니다.일본의 경우도 그렇게 해석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무토 선생님은 책 <아메리카 제국과 전후일본국가의 해체>의 “전후 일본국가와 혁신세력의 해체”라는 장에서 68혁명으로 인한 패러다임 전환의 특성을 11가지로 정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기존의 정당계열 식의 운동의 변화 2)자율적 운동의 상식화 3)일상적인 사회관계에서 나타나는 권력의 해체의 추구 그러면서 정치의 재정의 4)개발 및 근대화에 대해서의 비판적 시각의 정착 5)전국정치투쟁을 보편적 집약점으로 하는 구조(구미다테)로부터 개별과제(이슈) 별 운동으로의 전환 즉 매크로 운동으로부터 마이크로 운동으로의 전환 6)종적인 강고한 조직으로부터 네트워크형 조직으로의 전환 7)감성적인 해방 등을 열거한 바 있습니다.실제 일본의 68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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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10년만에 대집결한 오키나와 미군기지이전 집회.

무토: 당파적인 신좌익과는 다른 넓은 의미에서의 신좌익의 개념으로 보면 현재의 지배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라고 하는 공통적인 사고가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그 전까지 학생운동은 학생회를 중심으로 운동을 했습니다. 학생 전체가 멤버가 되지요. 그래서 대학의 분교화 정책(수도권외곽으로의 지방캠퍼스 추진정책, 학부별 분산을 통한 학생전체의 연대를 저지함으로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의 성격으로 추진. 맘모스대학인 일본대학을 전국으로 분산시킴)에 대한 반대투쟁, 정부의 전쟁책동을 분쇄하는 투쟁을 한 셈이었습니다.

정부의 정책이 대학을 통제하려하고 그것이 학생 전체에 영향을 미치므로, 우리가 대학을 지킨다는 의식으로 학생회가 전면에 나서서 투쟁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동맹휴업을 선언하고 전체가 투표를 해서 결정하고 집행하는 운동을 했습니다. 당국이 금지하기는 했지만, 대학 자체를 지켜야 하고, 대학은 자치라고 하는 생각을 1965년 이전에는 모두가 했습니다. 여기에는 학교측은 우리편이라는 인식이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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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신간 잠재적핵보유와 전후국가-무토 이치요우.
그러나 1965년 이후가 되면, 대학자치라고 하면 그것은 교수의 자치라고 하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교수가 학생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대학 자체라는 것이 사회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이런 식으로 문제설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에 진보적 교수가 많고, 논문이나 잡지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싸우는 학생들을 쉽게 처분해버리고, 제명하지 않은가.

예컨대 동경대는 역대 제국주의의 리더를 배출해 온 기구가 아닌가 하는 식으로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과는 문제제기 방식이 달라졌지요. 이전에는 권력과 싸울 때, 내각의 어느 부서에 권력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대학을 지킨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의 제도 내부에 권력이 있고, 교수와 학생 간에도 권력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발상이 바뀐 것이지요.

이것은 일본의 체제변화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이 경제적 복구의 시기일 때는 사람들의 인식을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60년대 후반이 되면 일본의 지배체제 자체가 자립을 하게 됩니다. 정보경찰에 의한 통치 시스템이 아니라, 조직화된 사회 자체가 권력 메카니즘으로 바뀌는 사회시스템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 전에는 지켜낸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부셔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현재의 시스템을 방어한다고 하는 인식과는 달리, 반대로 이를 부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지요.

베트남 반전 시민운동과 폭력혁명론의 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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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과 현실-무토 이치요우.

조+이: 새로운 인식은 이해가 가지만 그게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개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무토: 왜 그렇게 대중운동으로 확대되었는가. 거기에 베트남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전의 와세다 대학(65년 등록금인상거부투쟁)이나 게이오 대학(64년 공학부를 중심으로 등록금인상 반대투쟁을 조직하여 건학이래 최대의 학생운동을 조직)의 투쟁이 선도적인 투쟁사례로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투쟁에서는 등록금 반대투쟁이 있고, 산학공동협력에 대한 반대투쟁이 있었습니다. 기업이 대학을 동원하는 시스탬에 대해서, 거기에 학생이 만족하면서 취업해 들어가게 되는 것 자체가 억압구조가 아닌가 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평화운동도 이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헤련(べ平連;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60년대 중반에 결성된 일본의 대표적인 베트남반전평화운동단체)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안보투쟁은 거대조직이 주도를 했죠. 하지만 베헤련은 오다 마코토(1931년-2007년,일본의 작가, 9조회의의 제안자, 베헤련운동의 창시자)씨 등 시민파 지식인들이 리더를 했고, 훌륭한 강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계적인 거대조직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베트남에 평화를! 베트남은 베트남 사람들의 것으로! 일본은 베트남전쟁에 협력하지 말라!”라고 하는 3가지 슬로건에 찬성하고 행동하면 다 베헤련이었습니다. 무슨 베헤련, 무슨 베헤련 등 지역에 300개 이상의 독자적인 베헤련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중앙에는 본부가 없었습니다. 실제는 동경 베해련이 사무국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고, 오다 마코토가 중심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위적인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모두 평등하게 참여했지요. 그런 의미에서 60년대 안보투쟁과 베헤련은 다른 운동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68혁명과정은 유럽의 운동의 영향이 컸는데,일본의 68은 일본사회의 내부의 변화에 크게 기인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토
베헤련운동의 상징문자 “죽이지 마라”.
조+이: 이 시기에 일본의 좌파운동내부에는 폭력성이 많이 표출되었습니다. 이것에 비교하면 이후 나타나는 베헤련 운동은 매우 평화적인 시민운동의 지향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데요.

무토: 당시에 폭력적으로 경찰에 대항해서 투쟁을 하게 되니까,왜 이렇게 폭력적으로 운동을 하는가라는 식의 비판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정도의 ‘폭력’이 아니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지지여론도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폭력적 투쟁이 난무하는 속에서,뭔가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당시에는 무엇이든지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고요. 요시카와 유이치(吉川勇一, 1931~, 일본공산당출신으로 65년 원수협 세계대회의 방침에 반대하여 제명당함. 이후 시민운동가로 변신, 베트남반전평화운동의 사무국장역임)와 저를 비롯해서 좌익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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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헤련사진-오다마코토(오른쪽 두 번째).
외부에서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투쟁에 대한 우려감이 있었던 상황이었지요.학생들의 섹트운동에 동조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헤련과 같은 열린 장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베헤련운동은 65년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베헤련은 출범 초기인 65년부터 ‘탈주병’을 지원하는 운동을 했습니다. 10월 8일이 하네다 공항점거투쟁이었는데, 연이은 탈영병 지원운동이 일본사회에 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탈영병 지원운동이란 베트남전쟁 반대의 탈영병을 해외로 망명시키는 운동이었지요(60년대-70년대 베헤련은 주일미군기지의 미군들의 반전운동을 지원하였고 탈영병을 해외로 망명시킴. 그 실체는 아직까지 명확히 파악되지 않음. 최초의 탈영병은 미항공모함 인토레비트호의 4명의 해군으로 오다마코토, 츠루미신슈케 등이 소련경유로 스웨덴 망명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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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쟁반대 의견광고-베헤련시대의 연장-죽이지마라.

스웨덴에 망명을 시키고 일본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당시 500여명의 기자가 모였는데, 우리는 탈영미군을 소련 경유로 스웨덴으로 보냈다고 발표했습니다.당시 소련이 미군을 스웨덴으로 보내주겠는가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일부러 소련 경유를 밝혔습니다. 그것이 사회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몇 백명이 데모를 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실질적인 지원활동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스타일은 다르지만,전학련 등의 폭력적 투쟁과 베헤련 투쟁 사이에는 무엇인가가 공유되고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현재를 방어하는 입장이 아니라, 지금이 문제라는 인식이죠. 안보투쟁이라는 것은 전후를 통해서 쟁취된 평화가 위기에 처해 있었기에 지금을 지켜내는 것이었죠.

주류운동의 패배가 불러 온 비주류의 패배

조+이: 70년대 대표적인 투쟁 산리즈카 공항 반대투쟁과 미나마타 공해투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것이 이후 사회운동 전체에 미친 영향이 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70년대 운동의 패배의 원인은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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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공항의 산리즈카.

무토: 70년대 중반 이후 사회운동이 왜 극단적인 패배의 방식으로 나타났는가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을 생각하게 됩니다. 운동이 제기하는 이슈들은 다양했는데 각각 가능한 해결방식의 수준이 너무 달랐습니다. 짦은 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것도 많았는데,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해서 그것을 과격하게 추구하면서 실패한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운동의 전환을 해야 했었는데, 그 전환의 방법에 대한 지혜가 부족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전공투 운동이라는 것은, 대학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제기를 했지요. 동경대의 경우 동경제국대학을 해체하자는 요구를 했습니다. 동대라는 것이 사회 속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인재를 재생산하는 기구라고 한다면, 그것을 해체하고자 할 때 그것은 캠퍼스 점령으로만 안 됩니다. 사회적으로 해체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학교 밖의 운동과 연결되어야 하고, 밖에 그러한 해체운동이 없으면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런 운동이 없었습니다.

대학투쟁이 실패한 다음에 학생운동가들이 공장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는 자본의 힘이 너무 커서 많은 노동운동가들도 실패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학생운동은 이처럼 사회전체를 바꾸어야 하는 과제를 내걸고 마치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투쟁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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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파 잡지 임팩션 특집-전공투에서 리브운동으로.


이시기 운동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경우는 생협(연재 제5회 동경생활클럽 이사장 요시다유미코 참조)의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생활클럽(세이카츠크라브)의 경우 사회당 좌파에서 나온 세력이고, 그린 COOP는 쿠슈 지역의 전공투 세력입니다. 이이다 코프는 공산당계열이지요.

또 하나 일본운동의 몰락과 패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좌익주류파와 그에 대한 반대파가 대립하면서 서로 공생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1955년 이후 주류파는 위력적인 세력으로 존재했습니다. 사회당, 총평 같은 블록이 있고, 일본공산당이 어느 정도의 연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주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거기에 지식인들이 어느 정도의 대변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주류의 사상적 기반과 힘은 맑스주의였습니다. 여러가지 성격과 지향의 맑스주의라고 말할 수 있지만, 55년 이후 맑스주의의 우위성이 좌익운동 내에 존재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65년 이후의 운동은 주류의 좌익운동에 대한 반대파들이 주도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헤련 운동은 그 반대라는 의미를 그래도 적게 가진 운동이었지만요. 학생운동 섹트 운동은 주류 좌파정치세력에 대항하는 반대파였습니다. 주로 일본 공산당에 대한 반대파였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 반대파는 주류파에 반대하면서도 그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주류파가 없어지면, 자기 존재기반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딜레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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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피플스 플랜(PP21의 기관지).


그런데 바로 80년대 이후 이들 주류파가 점점 해체되고 몰락되어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반대파도 힘을 잃어가게 되었고요. 지배세력과의 주류적 대치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주류운동, 소수파 급진운동도 주변화될 수 있습니다. 80년대 중반의 국철민영화, 후반의 총평해체, 그리고 90년대 사회당의 해체 등에 의해서 주류파가 해체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장투쟁론과 혁명근거지론이 부른
운동의 신뢰성 파괴

조+이: 70년대 전공투 운동은 이후 운동의 패배로 이어지고 이는 73년 연합적군 사건과 같은 돌발적인 형태로 표출되는데요. 왜 이 시기에 급격하게 운동이 패배의식으로 전락하게 되는지요.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지요.

무토: 70년대 중반 이후 일본운동의 하락과 패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여러 섹트운동이 있었고 전국 정치투쟁이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사토가 방미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적 동원이 이뤄지고, 공동으로 정치투쟁을 했습니다. 전국투쟁위원회가 이것을 주도하는 형국이었죠.
그리고 전학련에는 행동위원회가 있는데, 그 내부에서 각 섹트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섹트는 투쟁을 하다보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병기를 가져와야 하고, 전쟁 하듯이 적과 싸워야 하고, 주민을 조직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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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철노조 80회 정기대회에서 24년간의 복직투쟁의 종결을 선언하고 있다.
분트 계열 중 일부는 결국 연합적군파(70년 안보투쟁을 계기로 나온 공산주의자동맹의 최좌익그룹인 적군파에서 분리된 분파. 일본국내에서 혁명거점투쟁을 주장했으나, 71년-72년에 걸쳐 산악캠프린치사건과 아사마산장인질사건을 주도함. 요동호를 피납해서 북한으로 이동한 요동호 그룹과 팔레스타인에서 해외혁명거점투쟁을 벌인 일본적군파와 구별됨)를 결성하게 되는데, 그들은 실제 무장투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연합적군의 과격한 행동은 탄압을 받게 되었고, 더 과격하게 되면서 궁지로 몰리게 됩니다. 준(準)전시체제로 싸우는데, 전략은 거의 없었지요.

또 하나는 혁명 근거지론입니다. 일본만을 바라봐서는 안되고, 세계혁명의 일환으로 연대하기 위해서는 전세계의 혁명근거지를 지지하고 옹호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도호를 납치해서 평양으로 가는 요동호그룹(70년3월 31일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9인이 일본항공 요동호를 납치하여 북한에 착륙시킨 사건의 그룹을 명칭. 승객은 후쿠오카와 서울에서 석방됨. 북한이 망명을 받아들였으나 미국에 의해 테러국가로 지정됨. 실행자 3인은 북에서 사망, 2인은 일본에 귀국하여 유죄판결, 4인은 북한에 체재중)이 결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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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투시대 신좌익의 헬멧.
또한 팔레스티나와 연대하는 아랍적군파(72년 5월30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서 일본적군에 의한 공항난사사건을 일으킴. 최고책임자 시게노부후사코(重信房子)가 2000년에 체포, 2001년에 옥중에서 일본적군의 해산을 발표, 2009년 6월에 산케이신문에 인터뷰게재)도 결성됩니다. 이들 전투적인 섹트는 좌파 전체로 보면 주류는 아닌데, 일부 영역 내에서는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운동이 갈 데가 없는 한계에 봉착한 상황에서 최후의 혁명근거지의 건설이라는 논리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좌익혁명론에는 전위당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 모든 좌파세력들은 모두가 유일 전위당론에 서 있었습니다. 자신만이 존재하는 하는 유일한 것이 여러개가 존재하고 있는 형국이지요. 혁명을 위해서는 유일전위당이 필요한데, 모두가 다 자신들이 유일한 전위당이라고 생각하면, 반대파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지요. 그러다 보니까, 자신들의 유일전위를 방해하고 있는 반대파를 살해하는 우치게바(내부폭력, 독일어Gewalt위력, 폭력에서 유래. 일본의 신좌익운동내에서 좌익당파간의 린치 및 테러 등 폭력을 이용한 내부 투쟁의 의미. 기동대 등 국가권력에 대한 폭력은 소토게바(외부폭력)으로도 불림)라는 극단적인 내부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영채
잡지 AMPO-Vol.12 No.1-1980-.


우치게바의 명분은 유일 전위정당론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장폭력에 의해 경찰에 쫓겨 소수화되면서, 결국 권력과 싸우지 못하고, 자기 세력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트로츠키파라고 할 수 있는 중핵파는 자신의 분파인 가쿠마루(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마르크스파.약칭 가쿠마루[革マル]파)를 스파이라고 하고, 가쿠마루는 중핵파(59년에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전국위원회[약칭 중핵파(中核派?츄가쿠하)])를 스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따라서 자기들이 반대파와 싸우고 그들을 죽이는 것은 동지가 아닌 공안과 국가권력에 대항해서 싸우고 죽이는 것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연합정치투쟁에서 이러한 우치게바 같은 행위를 하는 섹트가 참여하게 되는 경우, 어느 한 섹트가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면, 전체 정치투쟁도 신뢰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연합정치투쟁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게 되고요. 이러한 영향으로 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전국정치투쟁은 전개되지 못하고 개별 섹트투쟁만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갑니다. 점차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 전국공동투쟁은 없어지고 오히려 그런 공동투쟁을 기피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영채
일본군 위안부 해결 수요집회 1000회 동경외무성포위 인간사슬집회.

새로운 평등한 사회의 구성방식으로서의 인터피플사회

조+이: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다음 세대에 전해주고 싶은 운동적 지혜가 있다면요.

무토: 저는 전위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전위주의에 입각해서 공산주의 노동자당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최종적으로는 분열해서 없어졌습니다. 역시 당만으로는, 당의 형태로는 안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희들의 생각은 몇가지 단계가 있기는 한데, 민주자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여러 종류의 집단 속에 자치라는 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있지만 일관된 자치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 100명의 집단이 있다면 이들이 대등하게 존재하는 방식은? 예컨대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고, 다양한 층들이 존재할 때, 이 다양한 층들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등등 새로운 평등한 사회의 구성방식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예로 저는 자치라는 것에 대해서 인터피플(inter-people)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입니다. <끝>

<인터뷰 진행자>
조희연 교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대학원 교수. 현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대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학술단체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역임. 저서로는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정치변동>,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빈곤과 계로>, <박정희와 개발독재체제>, <동원된 근대화> 등이 있다.



이영채 교수

일본 케이센대학교(惠泉女學院大學校) 국제사회학과 교수. 케이오대 및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일본 PARC(아시아태평 자료조사센터) 연구원 및 현장잡지 [노동정보]편집위원 역임, 야스쿠니 반대 동아시아 촛불행동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참세상>에 일본사회운동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일본의 노동현장 잡지 [노동정보]에 한국의 사회운동의 글을 연재하는 등 한일시민/민중연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初恋」からノムヒョンの死まで』(梨の木舎), 『なるほど!これが韓国か--名言・流行語・造語で知る現代史』(朝日新聞社),『IRISで分かる朝鮮半島の危機』(朝日新聞社) 등이 있다.


조희연 이영채 교수

조희연 이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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